[2022 하반기-함께가는여성] 활동가 다이어리: 다시 적극 회원이 되어야 할 시간
[2022 하반기-함께가는여성] 활동가 다이어리
다시 적극 회원이 되어야 할 시간
1999년 민우회 회원 활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민우회 활동을 하고 심지어 대표까지 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 8~9년 정도 여성운동을 중단했던 시간이 있었다. 독박육아와 가사노동으로 분노가 가득하던 시절이다. 더 이상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을 되뇌이며 하루하루를 보내다 운명적으로 다시 민우회를 만났다. 당시에는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모니터링과 미디어교육에 참여하였다. 비로소 숨을 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민우회는 내게 일종의 산소호흡기 같은 존재였다. 때로는 상근활동가로, 때로는 비상근활동가로 23년을 보내고 어느 날 정신 차려보니 대표가 되어 있었다.
책임과 권한이 적지 않은 대표로서 주의와 긴장 필요해
민우회 본부의 상근자 중 임기가 정해져 있는 활동가는 두 명의 대표와 사무처장, 부설 성폭력상담소 소장이 있다. 사무처장과 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총회에서 선출된 대표에 의해 임명되고 연임 제한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격하게’ 임기를 규정하고 있는 직책은 대표가 유일하다. 수평적인 조직문화가 확대되고 조직 내 다양한 구성원의 목소리가 균형을 이루면서 대표 한두 명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시대가 아니라고 해도, 대표가 가지는 법적 책임과 권한은 여전히 적지 않다. 때문에 민우회는 연임 제한을 두어 개인의 역할과 영향력이 너무 확대되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으며, 활동가나 회원과 위계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여행과 공부, 넉넉한 자유를 꿈꾸던 시간들
이렇게 한시적으로 주어지는 대표 임기는 단점보다 장점이 많다. 우선 누군가에게 너무 오래 대표성이 부여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함께 만들어가는 민우회의 활동이 개인에게 환원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당사자에게도 어떤 역할을 언제까지 수행할지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그에 따른 계획을 세우거나 힘을 안배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다. 숨돌릴 틈 없이 무언가를 해내야 할 때도 임기 후 누릴 넉넉한 자유를 상상하며 조금 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3년 그리고 다시 3년, 임기가 끝나고 나면 얼마간 여행과 공부를 하면서 지내리라 기대했었다. 20년 넘게 나름 열심히 활동했으니 그 정도 호사는 부려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변수가 생기고 말았다. 구조적 성차별을 부인하는 대통령이 당선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수많은 페미니즘적 비전을 잠시 유보하고 그들과 맞서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초유의 백래시 상황에서 다시 한번 힘을 모아야
앞으로의 싸움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면서 혼자만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닌지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는 공백을 우려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신뢰하는 활동가와 신임 대표가 존재하는 만큼 앞으로의 과정을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거세질 파도를 고려하면 혼자만 부담을 덜어내고 떠나는 게 아닌지 온통 마음이 편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미안해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페미니스트라면 이 싸움 속에서 더욱 강해지고 성장할 것이라는 점도 모르는 바 아니다. 모름지기 전 대표는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새 정부가 출범한 지 만 1년도 되지 않아 신당역 사건, 이태원 참사, 여가부 폐지 등 대응해야 할 이슈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는 듯 하다. 여유롭게 보내려 했던 시간을 조금은 단축하는 수밖에. 내린 결론은 다시 적극 회원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이다. 당시와 같은 방식의 회원 활동은 아니겠지만 활동가들이 좀 더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조력하고 응원하는 회원이 되고 싶다. 아마도 2023년은 이렇게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한 해가 될 것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면 성평등한 사회로 변화도 가까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그려온 차별과 혐오 없는 사회를 위해 다시 한 번 힘을 모아야 할 시기다.
▲지난 9월, 활동가들과 ‘약자생존’ 행진을 하고 있는 미몽
미몽
❚ 여는 민우회 상임대표
외향인. 미디어 감시와 신기술 따라잡기, 토론을 좋아함. 2015년 이후 페미니즘 대중화가 가져온 변화에 자주 울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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