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하반기-함께가는여성] ‘약자생존’의 사회에 미리 가 있는 사람들
[2022 하반기-함께가는여성] 활동_성평등네트워크팀
‘약자생존’의 사회에 미리 가 있는 사람들
9월 24일 토요일 오후 1시,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열린 ‘약자생존: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은 ‘다른몸들’, ‘신경다양성지지모임 세바다’(이하 세바다), ‘한국여성민우회’(이하 민우회)가 함께 준비했다. ‘약자생존’을 통해 적응한 사람만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약자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약자생존’의 사회를 말하고자 했다. ‘‘비정상’이라 밀쳐지고 배제되는 모든 존재를 위한 광장,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이들이 정상으로 승인받지 않아도 모두가 온전히 평등하게 존재할 수 있는 광장을 준비했다.
느릿느릿하고 돌아버린 행진
초록색 잔디 광장에 놓인 빈백에 세상 편한 자세로 누워있는 사람들, 돗자리에 앉아 자신의 아픈 몸에 대해 말하면서 바느질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미친년’에게 100송이의 총천연색 꽃과 사랑과 연대를 담은 편지를 남기는 사람들, 각양각색의 비즈를 약봉지에 담아 나만의 약을 제조하는 사람들, 나와는 상관없이 내게 붙이는 정체성의 이름과 진단명을 부수고 스스로 이름을 짓는 사람들, 나를 미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외치는 사람들, 을지로 도로 한가운데에서 손담비의 ‘미쳤어’를 들으며 도는 사람들, “저항이 나의 쓸모”라는 피켓과 꽃을 들고 아주아주 느리게 행진하는 사람들. 9월 24일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열린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 약자생존’에서 볼 수 있었던 장면이다.
연대의 자리에서도 밀려난 비정상들이 결집한 곳
‘약자생존’은 ‘다른몸들’, ‘세바다’ 그리고 ‘민우회’ 세 단체가 도원결의(?)를 맺어, 반년간 만났다 하면 하루 3~4시간은 뚝딱 해치우면서 회의에 회의를 거듭해 기획하고, 각종 실무와 씨름하며 만들어졌다. (어떤 실무를 했는지 민우회 홈페이지를 통해 약자생존 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씨름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광장에 모인 모두가 무리하지 않고, 편안하게 자기 모습대로 존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였다.
“매일매일 먹어야 할 약 알 수를 세어야 하는 약자들의 생존 스토리 파티”, “장애와 질병이 있는, 체력은 저질이고 속도는 느린 우리”가 “시시각각 변하는 몸 상태와 상황 속에서 고도의 전략을 짜며”, “아직 매번 없는 길을 만들어가는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과정”이 있는 곳, “강함과 약함의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곳, “‘논리적’이지 않고 구구절절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신질환자들의 이야기,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들리는 곳, “비건과 장애인과 비수도권 사람과 청소년과 난민과 아픈 사람과 트랜스젠더와 퀴어 페미니스트가 우리도 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공간을 약자생존의 광장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혐오와 차별과 폭력 밑에서, 결국 우리는 같이 위축되어있고, 같이 고통받고 있으며, 하나의 해결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비정상’들의 연대는 결국 세상의 모든 이들을 위한 연대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1)
▲'약자생존' 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각종 피켓을 들고 걷고 있다
▲프로그램 '미래완료'. 내가 원하는 미래를 적은 각각의 패널들을 이어 조형물을 만들었다
‘약자생존’의 사회에 미리 가 있는 사람
오랜 기간 구성원 모두가 최선을 다해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약자생존’은 완전하게 우리가 만들고 싶었던 공간이 되지는 못했다. ‘약자생존’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품을 내어준 스태프를 위해 준비한 식사와 간식은 다양한 접근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제공되었고 시각장애, 인지적 장애가 있는 이들과 어린이를 위해 온라인 설명 페이지를 만들어 접속할 수 있는 큐알코드를 준비했지만, 이용방법이 잘 안내되지 못했다. 그리고 ‘약자생존’을 준비하는 길고 지난한 과정에 비해 일을 맡을 인원은 부족하여 구성원들 모두의 속도에 맞추며 진행하기 어려웠다. 우리 역시 “전형적인 신체에 맞춰 돌아가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갑자기 ‘약자생존의 사회’에 사는 사람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약자생존’의 끝에 사회를 본 제이 활동가의 말을 되새겨 본다. ‘약자생존’이 만들고자 했던 시공간이 여기저기 더 많이 생겨나기를 바란다는 말. 종국에는 이 사회 자체가 ‘약자생존’의 공간이 되는 것을 상상한다. 언제 어디서든 ‘빈백’처럼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사회, 다른 사람의 아픔을 묻고 듣는 사회, 약 먹는 것을 드러내고 말해도 괜찮은 사회, 문자 통역, 수어 통역, 외국어 통역을 원한다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사회, 목소리를 애써 고르지 않아도 되는 사회, 화장실을 마음껏 갈 수 있는 사회, 느리게 걸을 수 있는 사회,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사회. 어쩌다 잠깐 생긴, 어떤 행사의 일부로서의 시공간이 아니라, 일상이 항상 그날의 잔디광장 속에 있는 것 같은 사회에서 사는 상상을 공유하고 싶다. 동시에 ‘약자생존’의 사회에 미리 가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다짐해본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같이 그런 사람이 되어보자고 제안해본다.
1) 인용된 문구들은 모두 '약자생존' 행사에서 발언해준 분들의 말들에서 가져왔다. 발언문 전문은 민우회 홈페이지에 업로드된 약자생존 후기에서 읽을 수 있다.
해파리
❚ 여는 민우회 성평등네트워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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