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6월호 [특집_성희롱 밖으로 걸어나가다]성희롱-양날의 칼
특집_성희롱 밖으로 걸어나가다
성희롱 밖으로 걸어나가다(2)
성희롱-양날의 칼
먼지
(이 글은 민우회 성폭력상담소와 고용평등상담실이‘정몽준 성희롱 사건’으로 촉발된 고민에 대해 함께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생산되었습니다.)
한 기자가 국회의원 후보자에게 취재 관련 요청을 하자 후보자가 그 요청을 거절하면서 기자의 뺨을 손으로 툭툭 쳤다. 불쾌감을 느낀 기자는 그 자리에서 “지금 성희롱 하신 겁니다.” 라고 항의했다. 그 항의에 따라 이 일은 ‘성희롱 사건’으로 공론화되었다. 후보자는 처음에는 우연히 뻗은 팔이 기자의 얼굴에 닿았을 뿐이라며 행위 자체를 부인하다가 사건이 연일 기사화되자 기자를 찾아가 사과했다. 기자는 여성이고 후보자는 남성이다. 바로 지난 4월 총선 기간에 있었던 ‘정몽준 성희롱 사건’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때로 그 관계 속에서 불편한 일, 화가 나는 일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불편함과 화가 상대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 경우에는, 부당한 일이라고 느끼고 상대방에게 항의해 반성을 요청한다. 나의 경험을 사회 문제로 공론화해서 더 나은 관계, 한쪽이 일방적으로 부당함을 경험하지 않는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정몽준 성희롱 사건’ 은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관계 속에서 느끼는 부당함을 사회적 문제로 공론화하여 개선하려했던 시도였다. 이 글에서는 그 공론화의 과정이 ‘성희롱’이라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하여 현재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부당함이 공론화되는 방식을 점검하려 한다.
먼저 ‘정몽준 성희롱 사건’ 당시 발생한 부당함의 내용을 살펴보자. 기자와 정몽준씨는 서로 친밀하지 않은 두 사람이 공적 용무로 만난 상황이다. 내가 그 상황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상대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얼굴을 톡톡치는, 즉 상대의 신체를 간섭하는 행위는 상대를 어떻게 생각할 때 가능할까? 만약 상대가 선생님이거나 직장상사라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상대의 얼굴을 건드리는 행동에는 ①상대는 나보다 낮은 지위를 가졌다. ②나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상대의 신체는 함부로 간섭해도 된다는 두 가지 의미가 숨어 있다. 즉, 정몽준씨의 행동은 ①기자는 정몽준보다 낮은 지위를 가졌다. ②정몽준은 자신보다 낮은 지위의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기자는 흔히 낮은 지위로 취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상황을 한번 가정해 보자. 만약 기자가 정몽준씨 보다 나이가 많았다면? 그런 행동은 가능하지 않다. 만약 기자가 남성이었다면? 아마 어깨를 툭툭치는, 간섭의 정도가 덜한 행동이 가능할 것이다. 이제 결론, 정몽준씨는 나이가 어린 사람, 그리고 여성을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여긴다.
사건 당시 기자가 느낀 불쾌감은 단순한 신체적 접촉에 대한 불쾌감은 아닐 것이다. 그 행동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여성이라고 하대하는 상대의 태도를 느끼고 화가 났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례한 행동을 하는 상대방이 잘못이라고 생각해 항의를 한 것이다.
이제 그 부당함이 공론화된 과정을 살펴보자. 기자는 성희롱이라는 언어로 상대의 행동에 항의했다. 이에 대해 ‘얼굴을 어떻게 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동영상을 공개해야 한다.’, ‘가슴이나 엉덩이가 아닌 얼굴을 만진 것이 어떻게 성희롱이냐.’ 는 반응들이 있었다.1)
이런 반응은 많은 사람들이 성희롱이라는 언어를 성적(sexual) 침해, 그 중에도 성적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말로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정몽준씨의 행동을 성희롱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자는 부적절한 언어로 문제를 제기한 것일까?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 내가 그 기자의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어떤 말로 항의를 하면 상대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리고, 사과도 받을 수 있을까? 만약 ‘무례한 행동입니다.’ 라고 항의했다면 적절했을까? ‘무례한 행동’ 이라는 말은 정몽준씨의 행동이 상대가 여성이기 때문에 일어난 성차별적 행동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을 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기자는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부당함을 겪었다고 느꼈고, 그래서 여성에 대한 침해를 문제제기하는 말인 성희롱이라는 언어를 채택했다.
또한 ‘무례한 행동’으로 항의했다면 문제제기조차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법적 개선제도가 있기 때문에 성희롱은 법적 처벌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있다. ‘무례한 행동’이라는 말로 항의했다면 그 항의는 부산한 인파 속에 묻히기 쉬웠겠지만 ‘성희롱입니다.’라고 항의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목했고, 공론화되었으며 결국 정몽준씨가 직접 기자를 찾아가 사과하게 되었다. 이렇게 상대의 나이나 성별, 지위에 따라 하대하는 행동은 큰 문제로 여기지 않지만 성희롱은 문제라고 여기는 인식이 이미 사회적 조건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정몽준 ‘성희롱’ 사건으로 공론화될 수밖에 없었다.
‘성희롱 사건으로 공론화 될 수밖에 없는 일’들은 현재 무수히 많이 발생하고 있다. 직장에서 남성 동료 혹은 상사가 여성 직원을 ‘떡판’라고 부르는 경우, 남성 집단이 한 여성에 대해 ‘걔 걸레라며?’ 하고 농담을 하는 경우, 회식자리에서 여성 직원에게 술 따르기를 요구하는 경우, 이 일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부당한 일들이다. 즉, 성별권력관계의 문제인 것이다. 이 일들에 대해 단지 ‘그러지 말라’고 항의하면 ‘까탈스러운 여자’라는 낙인만 찍힐 뿐 상황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성희롱이라는 법적 언어를 사용해 자신의 항의에 법제도의 무게감을 더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성희롱이라는 언어는 여성이 겪는 부당함을 드러내는 유일하고 강력한 문제제기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한계가 내포된 수단이다. 여성이 술 따르기를 강요받았을 때, 떡판이라고 불렸을 때, 냄비라고 불렸을 때, 그 여성은 단지 성적 침해를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나를 친밀감을 위한 감정 노동을 하는 존재, 외모로 평가받는 존재, 성적 대상, 미성숙한 존재로 한정지은 것에 대해 분노한다. 그리고 한 인격을 ‘감정 노동을 하는 존재, 외모로 평가받는 존재, 성적 대상, 미성숙한 존재’로 한정 짓는 것이 그 인격이 여성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희롱’이라는 언어로 문제제기를 하면 애초에 지적하려던 성별권력관계가 아닌, 성적수치심 유발 여부가 논란거리가 된다. ‘엉덩이는 성적이지만 얼굴은 성적이지 않다’는 식의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상정하고 신체부위에 가격을 매기거나, ‘걸레라는 말은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말이지만 떡판이라는 말은 성적으로 비하하는 말은 아니다.’는 식으로 성적 순결을 의심하는 말만이 여성에 대한 모욕으로 승인되는 것이다. 여성이 겪는 부당함을 공론화 할 수 있는 언어가 성희롱뿐인 상황에서, 성희롱이 성적(seaual) 침해, 성적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성희롱이라는 언어는 성별권력관계의 문제를 성적수치심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항의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이 판단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유리하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이 겪은 부당함을 성적(sexual) 침해로 부각시킬 수밖에 없다. ‘어느 부위를 만지든 신체적 접촉 자체가 불쾌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항의의 과정은 여성으로 하여금 ‘성적 침해의 대상’으로만 자신을 설명하게 만드는 과정이 된다. 부당함에 항의하기 위해 사용한 언어가 오히려 문제제기의 당사자를 침해받기 쉬운 대상으로 정체화 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몽준 성희롱 사건’은 성희롱이라는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여성이 겪는 부당함을 공론화할 수 있었던 사례이다. 그러나 살펴보았듯, 성희롱이라는 언어는 여성이 경험하는 모든 부당함을 성적(sexual) 침해로만 설명하도록 요구한다. 여성을 성적 존재로만 여기는 성별권력관계에 항의하기 위해 성희롱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 말이 여성을 더욱 성적(sexual) 존재로 한정짓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렇게 현재, 성희롱이라는 언어는 양날의 칼로 여성에게 주어져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언어일까?
최근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나경원씨에 이어 조윤선씨가 임명되었다는 뉴스를 전하며 “한나라당이 그동안 미인 대변인의 덕을 많이 봤지요. 그래서 이번에도 미인 대변인을 섭외했겠죠. 역시 미인들이 하는 말은 더 잘 듣게 되나 봅니다.”라는 말을 했다. 미인이라고 평가하든 비방용 얼굴이라고 평가하든 그 발언은 진행자가 여성을 외모로 평가되는 존재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이다. 진행자는 자신이 한말이 제 살을 깎아 먹는 말이라는 것을 느꼈는지 “아, 지금 제가 한 말이 성폭력인가요?” 라고 바로 덧붙였다. 진행자의 자문에 사람들은, 그리고 진행자 자신도 아마 ‘성폭력은 아니지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성폭력이 아니면 문제가 아닌 것인가. 성폭력이 아니라도 문제라는 것을 진행자 스스로 알기 때문에 그런 자문을 덧붙였을 것이다.
성폭력이 아니어도 문제인 것들, 성희롱이 아니어도 문제인 것들에 대해 굳이 새로운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그것이 문제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아마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신이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어떤 행동이 타인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미처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관계에서 문제제기가 있다면 대화의 자세로 그 문제제기에 참여하고, 필요하다면 자기검열도 해볼 줄 아는 성숙한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우리의 일상을 재조직 하는 일은 계속 되어야 한다. ‘성희롱이 아니어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몽준씨가 어떤 인격을 가진 사람인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서울 동작을 유권자 친구에게 말을 걸어볼 수도 있고, 혹은 지금 당장 그 라디오 프로그램 청취자 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굳이 성폭력인가요? 라는 물음을 덧붙여서 아니라는 대답을 유도하는 건, 이미 드러난 진행자님의 여성에 대한 인식을 반성하지 않고 단지 감춰보려는, 조금은 비겁한 행동처럼 느껴졌어요. 하지만 뭔가 잘못했다고 진행자님도 느끼신 것 같으니, 앞으로는 그런 방송을 듣게 되는 일은 없겠지요?’
먼지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본다.
마음이 조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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