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9*10월호 [민우ing] 물 좀 주소
내 몸의 기억과 감각을 만나는 몸/성 워크샵
물 좀 주소!
먼지
햇빛이 세고 바람 하나 없는 여름 낮. 하고 싶은 일은 없는데, 할 일은 많고 공기는 습해서 숨이 점점 막힌다고 느낄 때. 내가 알고 있는, 기분을 좋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등목이다. 나는 등을 까고 무방비 상태로 엎드려 차가운 물을 기다리면서도 그것이 어느 순간에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아슬아슬해진다.
혼자 타는 그네보다 누가 밀어 주는 그네가 더 신나듯이, 그 아슬아슬함이 푹 익은 피부에 물이 끼얹어지는 순간을 더욱 시원하게 한다. 꺅!
하지만 방법을 알고 있으면 뭐하나. 사무실의 공동 화장실에서, 공원이나 학교의 수돗가에서 나는 등목을 할 수가 없다. 시원한 물 한바가지면 순식간에 얻을 수 있는 생명력을 공공장소에서는 실현할 수 없다. 그러니, 땀을 뻘뻘 흘리며 웃통을 벗고 공원의 농구 코트를 뛰어 다니다가 수돗가로 몰려 가 콸콸 쏟아지는 물을 몸에 끼얹는 남자들을 질투어린 시선으로 쳐다보게 될 때면 생각한다. 누가, 내 기쁨을 뺏는/포기하게 하는 거지?
내가 공공장소에서 등목을 할 수 없는 이유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내가 생물학적인 ‘여자’라는 사실, 즉, 어깨 아래에 작고 귀여운 유방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대체 내 유방이 뭘 어쨌기에 문제인 걸까. 공공장소에서 어떤 여자가 등목을 하겠다고 윗도리를 벗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미쳤군.”부터 시작해서, 움찔하고 돌아서는 사람, 달려와서 옷을 덮어줄 사람, 미풍양속을 들고 나설 보수주의자와, 유후~ 하며 휘파람을 불어볼 간 큰 마초와, 자신을 성적으로 불편하게 했으니 환경형 성폭력이라고 주장하는 똑똑한 남학생까지 골고루 목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등목하는 여자가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들의 심정, 그리고 애초에 공공장소에서 등목을 하지 않는 나의 심정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은 여성의 상체는 성적 공간이라는 사회적 합의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상체가 성적공간인 이유는 또 대체 뭘까. 여성의 벗은 상체는 생리적으로 당연히, 성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가? 하지만 등목 하는 여자를 목격할 남성 일반의 일차적인 반응은 ‘야하다’라기보다 ‘당황스러움’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 당황스러움은 여성의 상체가 성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욕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 여성의 상체가 성욕을 불러일으킨다는 신화가 등목의 생명력을 추구하는 여성의 상체를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만, 성적 공간이라는 하나의 용도로만 한정지었다. 그리고 성적인 것은 곧 금기이므로 여성의 상체는 봉인된다.
자유를 추구하는 여성이라면 당연히 사회적 시선의 금기를 넘어 등목쯤은 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등목하는 여성을 관음증의 대상으로 삼아 “유후~” 하고 휘파람을 부는 마초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등목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빛나는 등을 가진 각각의 여성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 사회문화적으로 즉, 암묵적으로 하나의 선택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금지 덕분에 여성의 몸은 더욱 더 성적인 공간으로만 한정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성적인 공간으로 한정된 여성의 몸은 성적 경험 안에서는 그나마 자유로운가?
한 여자가 이렇게 말한다.
“중학교에 다닐 때, 나는 길 가다가 동네 남자애들만 마주치면 이상하게 몸이 굳어졌어. 긴장했던 거지. 그 애가 너무 멋졌기 때문이냐고? 아니, 여드름 빽빽한 빡빡머리 꼬마라도 또래의 남자아이이기만 하면 내 몸은 그렇게 되곤 했다니까.”
또 한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전 애인을 좋아했지만, 성적인 암시가 있는 스킨십에 대해서만은 그 애가 싫었어. 그런 느낌이 들면 피하고 싶어졌지. 전 애인은 내 몸의 반응을 미숙함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저런 시도들을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됐어. 우리 사이는 당연히 멀어졌지. 난 관계 속에서 내가 무기력해지는 것이 싫었으니까. 축축한 느낌, 적나라한 느낌들이 나는 여전히 싫어. 잘 말라 있는 것들이 좋아.”
여성의 몸은 성적인 공간으로 과잉의미화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화의 내용은 대부분 성적인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시선의 대상, 성적 행위의 대상, 침해의 대상으로 자기 몸을 느끼는 순간들, 많은 여자들이 그 순간을 언어화하지 않은 몸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억들은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몸을 조금씩 위축시킨다1).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우리 몸은 자유와 온전한 기쁨들 역시 간직하고 있다. 운동장 한 바퀴를 뛰고 헐떡이는 자신의 호흡에 실려 있을 때의 생명감 같은 것, 내 몸이 느끼는 불편함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의 자유로움 같은 것. 이것들 역시 탐사되지 않은 채 내 몸에 남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이다. 다만, 현재 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이 이 무궁무진한 몸의 기억과 감각 중 성적인 대상으로서의 경험만 주로 발굴하게 하기 때문에 답답한 것일 뿐. 그래서 제안한다. 몸에 대해 탐사해보자. 다른 몸의 기억들을 꺼내보고, 몸이 느끼는 불편함의 정체를 밝히고, 가장 뻔뻔한 몸이 되어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가장 사소한 기억들로부터 가장 결정적인 나를 찾아보자.
여기까지 말한 것이 바로 민우회 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할 몸/성 워크샵의 기획 의도이다. 10월 3~5일 15명의 여자들을 모아 서울을 뜬다. 자연 가까운 곳에서 성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내 몸을, 편안히 응시하고, 나누고, 찾아가고, 새롭게 욕망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기타를 치며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낭독하고 전혀 다른 몸이 되어 보는 소울메이크업을 통해 몸이라는 공간을 이해하고, 가볍고 깊은 수다들로 성적 존재로서의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할 것이다.
간잽이가 달인인 이유는 무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금의 농도에 따른 미세한 맛의 차이에 대한 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몸/성 워크샵은 참여자들의 기운에 따라 각자 다른 경험을 남기겠지만, 일단 경험을 막는 두려움을 한 겹 벗는,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 모든 재료들을 맛보는 신나는 시간이 될 것은 분명하다. 다들 모여들어 자기 몸에 대해 감을 잡아보자.
1) 물론 여성의 몸이라고 위축만 되는 것은 아니다. 몸짱이 되어 시선을 즐기고 통제하는 마돈나도 있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마돈나가 되는 것도 인생을 즐기는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몸짱의 자부심은 몸에 대한 두려움-늙은 몸, 남성적인 몸, 살찐 몸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반대급부일 뿐, 그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더구나 다이어트 식단을 실천할 수 있을 정도의 생활의 여유와(회식 한 번이면 다이어트는 무너지지만 말단 직원은 회식불참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피트니스 이용권이 없으면 단박에 사라진다는 점에서 지속가능하지 않다.
먼지 ● 몸/성 워크샵도, 민우회 기타반도 함께해요~
※ 몸/성 워크샵의 자세한 일정과 프로그램은 민우회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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