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10월호 [기 획 거울鏡; 비춰보기] 꼬리표 붙이는 사회
[기 획 거울鏡; 비춰보기] 꼬리표 붙이는 사회
살림 ●
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특정 사실을 이유로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며 꼬리표를 다는 일이 종종 있다. 하지만 수긍할 수 없는 경우도 많을뿐더러 한번 붙은 꼬리표는 쉽사리 떼지 못하기에 꽤 오랫동안 당사자를 괴롭히기도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붙어 다니면서 스스로를 옥죄는 꼬리표. 가던 길 멈춰서 잠깐 뒤돌아보자. 내 뒤엔 몇 개나 들러붙어 있는지….
꼬리표 하나 ‘전직 환경단체 활동가’
테이크아웃 커피점에서 개인컵을 꺼내는 나를 보고 룸메이트 친구가 했던 말. “전직 환경단체 활동가다운데!?” 장난 섞인 친구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들었던 것 같다. 한 번은 연일 뉴스를 달구는 4대강 사업에 대한 날선 공방 가운데, 두 번째는 가방에 넣어 다니던 휴대용재떨이에 대한 훈훈한 대화 속에서, 그리고 몇 차례 더…. 당시엔 알아채지 못했지만 룸메이트는 종종 내가 전직 환경단체 활동가였다는 점을 상기시켜주었다.
지극히 평범한 나의 일상을 두고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룸메이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여전히 “예전에 환경단체에서 일했었는데 지금은…”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나를 보면 아직 ‘환경단체 활동가’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다. 분명 나의 삶 가운데 한 부분이고 지금도 여전히 관심 가는 주제이긴 하지만 현재의 나를 ‘전직 환경단체 활동가’라고 소개할 순 없지 않은가.
그렇게 룸메이트가 달아준 ‘전직 환경단체 활동가’라는 꼬리표를 쉽사리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자판기에서 일회용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면서, 제대로 분리수거가 되지 않은 쓰레기봉투를 집 앞에 내놓으면서, 소음이 심하다는 핑계를 대며 멀쩡한 노트북을 두고 새것을 장만하면서… 나를 아는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게 될까봐 슬며시 걱정이 된다. 그래도 한때 환경단체 활동가였는데 그에 걸맞는 행동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책까지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부터 스스로에게 ‘전직 환경단체 활동가’라는 사회적 자아를 강요한다. 어쩌면 ‘전직 환경단체 활동가’라는 꼬리표는 내가 달아놓은 것 아닐까.
꼬리표 둘 ‘기호 8번’
그 룸메이트와 함께 살던 석 달 가운데 6.2지방선거도 끼어 있었다. 대구가 고향이고 조선일보를 즐겨보던 친구는 투표 날이 임박한 어느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나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였다. 현직 시장이 출마한 1번을 버리고 3번을 선택하게 된 고심의 과정을 상세히 털어 놓았다. 그리고 나의 대답을 기다리듯 나를 빤히 쳐다봤다. 같은 대구에서 자랐지만 대학 와서부터 정치 지향점이 서로 틀어진 내가 이번엔 과연 몇 번을 찍을까 사뭇 궁금했나보다. 선거가 끝난 뒤 나에게는 ‘기호8번’이라는 꼬리표가 추가됐다.
전직 환경단체 활동가라는 꼬리표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사실 ‘전직인데 뭐 어때?’라며 슬쩍 빠져나갈 구멍도 있고 그래도 고생했구나 하는 연민이라도 받으니까. 하지만 정치 지향은 얘기가 좀 다르다. 얼굴빛이 달라지고 억양이 높아지고 날을 세운 대화가 오간다. 특히 선거 같은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땐 더 그렇다. 어쩌면 선거는 개인의 정치적 지향을 단숨에 숫자 하나로 뽑아내버리는 바코드 인식기계 같다는 생각도 든다. 너는 도대체 몇 번이냐, 나와 같은 번호냐, 5번을 찍다니 너는 어쩜 그럴 수가 있느냐, 8번 찍은 걸 보니 너는 그렇고 그렇구나…. 선거가 무르익는 동안 주변의 시선은 끊임없이 한 개인에게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밝히기를 강요한다. 강탈하다시피 빼앗은 그의 선택을 놓고 한 개인을 규정하고 판단한다. 2002년 대선 뒤 같은 고향 친구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1번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신자’라는 누명을 덮어 쓴 뒤 어거지로 술값을 냈던 씁쓸한 기억처럼 적외선 레이저 같은 사회적 시선 앞에 4,800만 국민은 ‘삑’ 소리와 함께 숫자 하나를 토해내고 선거결과 책임론이라는 계산대 앞에서 자신이 발설한 그 숫자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아닌지….
선거 때마다 뒷번호만 골라 찍고, 무노조 악덕 대기업에 반대하며 국가나 국익이라는 말을 소름 돋듯 싫어하지만 나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내가 프로야구 ‘삼성라이온즈’의 광팬이라는 점이다. 지배권 승계를 위한 불법증여에 화가 나고, 노동자의 인권을 유린하는 것에 불매운동으로 동참할 수는 있지만, 삼성라이온즈의 야구경기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어쩜 그럴 수가’, ‘거봐 너도 어쩔 수 없다니까’ 혹은 ‘동지를 배반하고 자본의 노예가 되다니!’ (여기저기서 원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대기업과 자본의 횡포에 반대하는 나의 주장에 논리적 허점이 생기는 것 같아 꽤 오랫동안 숨겨왔다. 일전에 처음으로 지인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내가 삼성라이온즈의 팬이 된 것은 마치 모태신앙 같은 것이라 어쩔 수 없었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지 않느냐며 둘러댔다. 정치적 지향이 개인적 취향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꼬리표 셋 ‘채식주의자’
재작년부터 채식을 시작했다. 채식을 하는 2년 반 동안 수없이 많은 식사 약속과 회식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꽤 많은 자리에서는 채식한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했다. 적절한 무관심과 작은 배려로 편하게 대해주는 센스 넘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채식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며 신기하게 보는 사람부터 궁금했던 것들을 잔뜩 물어보면서 질문 공세를 퍼붓는 사람, 채식으로 인한 위험성과 채식의 논리적 허점에 대해 열띤 주장을 펴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반응을 마주했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기존에 인식하고 있던 채식주의자의 전형과 나를 비교하면서 충고까지 잊지 않는다. 그렇게 강렬한, 하지만 짧은 대화가 지난 뒤 내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경악한다. 채식주의자인데 어떻게 담배를 피울 수 있느냐고!
‘-주의자’라는 말에 대한 사회 일반의 시선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개 평균에서 이탈한 사람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채식주의자에 대해서는 별난 사람,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채식주의자>에서 채식을 선언한 주인공에 대한 묘사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기이하여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정상적이지 못한 사람을 연상시킨다. ‘-주의자’로 살아가는 데에는 사회의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몫까지 함께 떠안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 ‘-주의자’라고 하면 특정 가치만을 열렬하게 추구하며 원칙을 중시한다고 생각해 다양한 스펙트럼이나 예외 상황을 허용하지 못한다. 사실 채식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다양한 이유가 있으며 그 방법도 여러 가지이다. 요새는 웰빙 붐이 일면서 채식이 많이 알려진 탓에 담배피우는 채식주의자를 만나면 당황하는 것 같다. 환경문제나 종교,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말이다.
꼬리표를 어떻게 할까?
살다보면 이렇게 꼬리표 몇 개쯤은 달고 다니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원해서 선택한 것도 있고, 억울하게 덮어 쓴 것도 있고, 사실이지만 인정하기 싫은 것도 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남의 평가를 중요하게 생각할수록 스스로 더 불행해질 뿐이다. 또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이런 생각에만 늘 얽매여 있는 사람은 남의 시선의 노예일 뿐이다. 노예는 늘 주인의 눈치를 살피고 주인의 명령대로 살아가야 한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영화 <아들의 방>에서 주인공 ‘조반니’는 정신과 의사로서의 사회적 페르소나*에 얽매여 아들의 죽음을 맞이한다. 사회적 지위와 그에 걸맞는 품위, 성격 등을 유지하기 위해 쏟았던 열정을 스스로에게는 한 번도 보이지 못한 주인공 조반니는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뒤늦게 자신의 영혼에 만족을 줄 수 있는 삶으로 돌아선다. 영화에서처럼 강요받은 사회적 자아를 내려놓으면 그동안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개인적 자아가 드러난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신경쓰다보면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게 되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남이 달아 놓은 꼬리표는 이제 떼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보면 어떨까.
* 페르소나 : 심리학 용어로서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나타낸다. 원래는 그리스의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 말이었다.
살림 ● 떼고 싶은 꼬리표도 있지만 갖고 싶은 꼬리표도 많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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