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12월호 [기 획 ] 마흔단상
▣ 기 획 어 쩌 면 이 건 당 신 의 이 야 기
마흔 단상
전경순(또세) ●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우리 마을에서는
묘비에 나이를 새기지 않는다오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오
사는 동안 진정으로 의미 있고
사랑을 하고
오늘 내가 정말 살았구나 하는
잊지 못할 삶의 경험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 집 문기둥에
금을 하나씩 긋는다오
그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문기둥의 금을 세어
이렇게 묘비에 새겨준다오
여기 묘비의 숫자가 참삶의 나이라오
- 박노해, 삶의 이유 중
#1 어른들이 언제부턴가 나이 세는 것을 잊었다고 하시더니 내가 그러하다.
케이크 촛불을 내 나이대로 다 꽂는 것이 나도 싫다. 요즘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여배우들이 대세라고 한다. 내공 연기와 성숙한 외모, 나이를 잊은 자기 관리로 여주인공의 배역을 맡고 아울러 연하의 남성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다고 하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어쨌든 이런 소식이 내 어깨에까지 힘이 들어가게 하면서 흐뭇한 미소가 나오게 한다. 장서희가 어느 인터뷰에서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왜 벌써 마흔이야?” 라고 했는데, 그녀의 외침이 곧 나의 외침과 같다.
그래,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어느덧 소심해지는 마흔이다.
#2 얼마 전 업둥이로 달고 온 강쥐 녀석 두 마리. 한 녀석이 책상 아래에서 내발 앞을 지킨다.
나는 흔히 말하는 돌싱이다. 스물다섯 살에 결혼을 해서 두 사내아이를 낳았다. 엄마의 가슴에는 어릴 때의 모습 그대로인데, 벌써 고등학생이 되어 있다. 엄마에게만 순종했던 녀석들이 가끔 친구들과의 스케줄로 나와 한 약속을 미안해하며 펑크 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엄마가 없는 자리를 허전해하지 않은 듯하니 마음이 놓이고, 한편으로는 내 옆구리가 허전하여 울적하기도 하다.
하지만 강쥐 녀석들은 내가 올 시각만 기다렸다가 이내 내게 안기고 자기 가슴을 내맡긴다. 내가 어디를 가든 졸졸 따라다닌다. 이제 나 하나의 건강도 염려해야 할 시기에 귀하디귀한 또 다른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가볍지만은 않은 결정이나, 이런 재롱에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설레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강아지를 키우자고 내게 졸랐지만, 내가 강아지를 만질 줄도 몰랐기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마흔 넘어서 강아지를 키우게 될 줄이야.
#3 마흔이 넘어서 내가 하게 된 일.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되었고,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민우회를 알게 되어 나의 의식을 깨우게 되었다. 그리고 상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교사가 꿈이었으나, 억지로 하는 공부가 싫었다. 그냥 나의 꿈은 안개속 같았다. 그러나 봉사 활동을 나가면서 장애인에게 관심을 가졌고, 특수교육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교사라는 꿈 때문에 어린이집 시설장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나의 허전한 삶을 승화시켜 상담이라는 전문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이버대학교에 편입해서 상담 심리를 전공하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인데, 며칠 전 면접을 보러 갔을 때 교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경순씨는 상담일을 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냥 일반 회사만 다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상담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또랑또랑 대답했다. 그러고는 오늘에야 울컥 부아가 조금 나는 듯하다.
상담사가 되기 위해 만학의 길에 접어든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 고민 중의 하나는 학업에 대한 것도 있지만, 경제적인 것에 대한 것도 있다. 우리 나이는 그러하다. 부모님께 손 벌려 공부할 수 있는 나이도 지났고, 자식도 청소년이 되면 얼굴 보기 힘들다. 그래도 그녀석들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어야 하기에 내 욕심만 차릴 수도 없다.
민우회 가입 이후 알게 된 것이, 참 많은 여성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미혼들이 많더란 것. 그녀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을지 궁금해진다. 싱글이 된 지 5년째다. 어렸을 때는 왜 나이가 차면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때 민우회를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내 주변의 여자들은 나의 삶과 비슷했다.
마흔과 서른의 차이라면 30대에는 그래도 이력서를 내놓기가 좀 더 수월했다. 그러나 40대에는 이력서를 어디에도 내놓기가 어렵다.
#4 세월의 모퉁이에서 뒤돌아보면, 후배들에게 나는 참 안타까움을 많이 느끼게 된다. 아직도 남자 잘 만나 결혼해서 편하게 살아 보겠다는 후배도 보이고, 꿈도 없고 목적도 목표도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후배도 보인다. 세월이 흐르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늙어 간다는 것도 자연의 이치다. 나는 나이 들어간다는 것, 늙어 간다는 것에 감동을 느끼고 싶은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사과를 따서 먹을 손주를 위하여 사과나무를 심는 노인의 염원처럼 나는 마흔의 나이를 기쁨으로 먹고 싶다. 그러나 케이크의 촛불 개수랑 나이 세는 셈은 그냥 이대로 잊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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