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12월호 [문 화 산 책] 나의 일기 같았던 그녀의 12년 9개월
▣ 문 화 산 책
나의 일기 같았던 그녀의 12년 9개월
문지은(반아) ● 한국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
처음 책을 받아서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책을 건네주었던 노동팀 활동가 바람을 붙잡고 말했다.
“이 책을 많은 사람이 읽으면 좋겠어. 삼성에 다니지 않아도 직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겪는 모든 이야기가 다 담겨 있어. 거기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몸으로 부딪히며 해결해 가는 이야기를 같이 읽고 나누면 좋겠어”
정말 그랬다. 민우회에 오기 전, 이은의 씨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가슴이 뛴 적이 있었다.
삼성과의 재판에서 승소한 누군가라서가 아니다. 싸움의 시작과 끝이 다른 이의 손에 좌지우지되지 않아서 좋았다. 시작의 선택도 스스로 하고,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도 선택해서 묵묵히 걸어 나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책에서도 자세히 나오지만 사소하게라도 회사에서 불편한 관계를 맺게 되면 잘 알게 될 것이다.
상사의 성희롱, 선배와의 불화, 사내에서의 따돌림, 이해할 수 없는 내규 등등.
우리도 그녀도‘소속’안에 있으면 한 번쯤은 겪게 되고 목격하게 된다.
그때마다 깨닫게 된다. 거미줄처럼 얽힌 관계망 속에 걸려든 나약해진 모습을. 불편한 관계의 시작도 끝도 상사나 회사가 말하고 끝낸다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두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고졸 여사원과의 사건을 다룬 부분이었다. 한 부서에 있던 고졸 여직원이 몇 달 동안 아무 문제없던 호칭을‘언니’라고 부르라며 날을 세웠다. 그녀는 이 상황을 먼저 입사해서 경력이 많지만 비정규직이고, 갓 입사한 대졸 여사원과 비교되는 불편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도 회사에서 고졸과 대졸의 차이가 공공연하다. 고졸 사원들은 훨씬 앞서 입사하지만 승진도 어렵고 호칭이나 대우에서도 차별이 있다. 대졸 사원들은 입사 때부터, 명함이 있고 직함이 있다. 연차가 올라가면 그에 맞게 달라진다. 하지만 고졸 사원들, 특히 사무직 여사원들은 사원들이 갓 입사한 스무 살 그대로 대한다. 한 공간에서 똑같은 여직원임에도 느끼게 되는 차별은 갈등의 씨앗이 된다. 더구나 차 심부름이나 존중받지 못하는 언행이 빈번하면 갈등은 불꽃처럼 일어난다.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립각으로 바라보며 서로 훈수를 둔다. 누가 참아야 한다, 누군 성격이 모났다. 나도 이런 경우 비슷하게 훈수를 두었던 거 같다. 지은이는 어떻게 했을까?
어떤 사람들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며 동조를 구했다. 어떤 상사는 좀더 입장이 나은 네가 양보 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묻지도 않은 조언을 했고, (중략) 도통 뭐가 옳은지 알 수 없었으나 두 가지는 분명했다. 하나는 아무도 이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언니라고 부르냐 마느냐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 『삼성을 살다』이은의, 2011, p.98
그리고 ‘언니’라고 부르던 사람이 해주던 일을 배워서 혼자 해 나갔다. 내키지 않지만 분위기를 수습하려 억지로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언니’를 다그치거나 위계를 이용하지도 않았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결해나갔다. 마침 회사에서 비정규직 사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며 바늘방석 같던 관계는 해결됐다. 그리고‘언니’도 더 이상 ‘언니’라고 부르기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무릎을‘탁’치면서 감탄했다. 어떤 선배에게도 듣지 못했던 조언이었다.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줄다리기도 필요 없었다.
시작도 끝도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한다
어쩌면 다 자란 성인들이 모여 하나의 프로젝트를 만들고 계약을 따내는 곳이라면 이래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결정에 전전긍긍하고 마음 앓으며 불편과 차별을 감수하며 산다.
이름에서부터 윤이 날 거 같은‘삼성 직원’이라도, ‘여직원’이라는 건 어쩜 이렇게 판에 박히게 똑같을까? 회식에서 술을 따라 주는 것도, ‘생리휴가’를 쓸 때 눈치봐야 하는 것도.
성희롱을 고발하면 눈엣가시 취급 받으며 수많은 시선을 온몸으로 참아내야 하는 것까지도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다시 쓰일 수도 있다.
그녀는‘삼성’을 살았다기보단, ‘직장 여성’이란 이름을 살아냈다. 현명하고 용기있게 말이다.
제목을 “나의 일기 같았던 그녀의 12년 9개월” 이라고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같이 나의 이야기 같으며 에필로그의 글들은 나의 일기에 기록해 두고 싶었다.
이 사회에서 여성이 직장을 다닌다는 것,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을 한다는 것, 청춘을 살아간다는 것, 그런 평범한 일이 그토록 힘든 것일 줄 미처 몰랐다. 평범한 일상이 깨졌을 때 사람들은 내게 한발짝 비켜서면 다시 행복이 찾아올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발 딛고 선 이곳을 믿기로 했다. 타협하거나 도망치지 않아도 이곳을 지키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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