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겨울 [민우ing] 엄마도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해
그 사소한 15분
가장 사소한, 하지만 가장 절실한. 양육자들은 아이 키우는 일상의 고충을 이렇게 표현한다.
9시까지 출근하려면 8시 15분에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어린이집은 8시 30분에 문을 열 때, 사실 그 사이의 15분은 아주 사소한 시간이다. 하지만 양육자들은 바로 그 사소한 15분 때문에 삶이 바뀐다. 그 15분 때문에 직장을 어린이집 근처로 옮기고·학원을 도와줄 친정엄마가 있는 동네로 이사하기 위해 대출을 받기도 하고, 이도저도 안되면 결국 (엄마의 경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다. 그리고 몇 년 뒤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다시 취업을 하려면 이제 갈 수 있는 직장은 지난 경력과 전혀 상관없는 콜센터나 마트 캐셔 뿐임을 확인한다. 이 모든 일이 바로 그 15분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였다. <2013 민우회 성평등복지프로젝트: 보육, 현실이가 제도씨에게 묻다>1)에서 진행한 양육자들의 릴레이 수다회를 <가장 사소한, 가장 절실한>으로 이름 지은 것은.
아이 키우는 현실이들의 일상다반사
수다회는 총 7회, 19명의 양육자들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 다르지만, 또 어딘가 비슷하던 그 많은 이야기들을 ‘현실이가 제도씨에게 묻다’라는 슬로건에 맞춰 ‘현실이의 양육기’로 정리해 보면 이렇다.2)
여성친화 인증 기업을 다니며 두 딸을 키우는 현실이. 말이 여성친화기업이지 애 키우는 사람은 늘 눈칫밥이다. 연년생으로 임신을 해서 지난해에 입었던 임부복을 다시 회사에 입고 출근을 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상사들마다 “1년에 9개월만 일하고 참 좋겠어~.”라며 비아냥을 아끼지 않았다. 둘째 낳고 육아 휴직을 쓴 직후에 “세살까지는 엄마가 아이를 돌봐야 아이 정서에 문제가 없다”는 말을 100번쯤 듣고, 어린이집 급식은 빵 쪼가리뿐이라는 둥, 애들을 그냥 방치한다는 둥,각종 어린이집 괴담들에 불안에 떨다가 결국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시겠다고 해서 무리한 대출을 받아 친정 근처로 이사를 갔다. 하지만 퇴근 후엔 다시 육아는 온전히 현실이의 몫. 더구나 종일 아이 둘을 건사하느라 지친 친정어머니의 기분까지 보살피기란 쉽지 않았다. 이건 퇴근이 아니라 제2의 출근인 셈. 그러다 친정엄마가 아프시자 다시 대책이 없었다. ‘니 애 봐주느라 우리 엄마가 몸까지 상했는데!’ 라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남편을 쳐다봐도, 애는 역시 여자가 잘 본다며 한발 뒤로 빼는 남편이 답이 될 리가 없었고, 여성친화기업이라 직장어린이집이 있지만 본사에 딱 하나 뿐, 지점에 다니는 현실이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다행히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신청했던 어린이집에서 드디어 자리가 났다며 연락이 왔다. 사실 그나마 믿을만하다는 국공립에 보내고 싶었지만, 민간이라도 자리 난 게 어딘가. 원래 어린이집 운영시간은 아침 7시30분~저녁 7시30분. 야근이나 회식만 눈치껏 피하며 버티면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웬걸. 8시 30분에 가도 일찍 왔다며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고, 아이가 힘들어 한다고 5시 전에 데리러 오라는 연락을 받기가 일쑤. 그래도 아이가 힘들어한다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려 직장 동료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뒤로 하고 칼퇴근 후 어린이집에 달려가 보면 여기저기 불 꺼진 어린이집에서 보육교사는 지친 얼굴로 청소를 하고 남은 아이 몇몇이 TV를 보는 풍경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애를 두고 일을 하나’ 자책감에 마음이 와르르 무너진다. 알바 사이트에 어린이집 등‧하원 알바가 돌아다닌다던데 농담이 아니었구나 싶었던 순간. 또 어린이집에서는 간식을 해오라, 휴지를 사오라,보육비 외에도 달라는 게 어찌나 많은지. 그래도 하루하루 어떻게든 버티는 사이 직장에선 이미 찍혔고, 당연히 중요한 일들은 '야근 불사 회식 필참' 남자직원들 몫이고, 일에 치이고 육아에 치이다 보니 정작 아이에게는 짜증만 늘고…. 둘째가 3살이 되던 해, 현실이는 결국 일을 그만두었다. 현실이를 아끼던 선배는 ‘니가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서 팀장 자리를 놓치는 거’라고 했지만 더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십년 넘게 해오던 일을 그만두고 나니, 이번에는 내 반쪽이 사라져 버린 듯한, 온전한 내가 아닌 듯한 허전함이…. |
현실이에게, 제도씨가 대답해야 할 것
야근이 당연한 직장과 믿을 수 없는 어린이집 사이에서 고군분투 하며 살고 있는 현실이들. 수다회에서 이 현실이들에게 마지막 질문으로 ‘아이 키우면서 가장 간절한 것’을 물었다. 대답은 ‘자기만의 시간’. 어떤 현실이는 이렇게 말했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유일한 나만의 시간이니까. 엘리베이터를 안타고 아파트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가서 버리고 와요.”
자기만의 시간에 대한 요청은 단지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시간’이 휴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자기만의 시간인 이유는 아이와 분리되어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시간은 수많은 ‘나’ 중에서 양육자인 ‘나’만 남은 일상에 대한 갑갑함의 표현, ‘양육자가 아니기도 한 나’를 확보하고 싶은 욕구의 표현이다. 친구를 만나는 나, 야근도 불사하며 승진에 매진하는 나, 혼자 여행을 떠나는 나, 분명 ‘나’였던 이 모든 순간들이 엄마가 되면 다 사라지고 오직 ‘엄마인 나’만 남는다. 결국 다른 ‘나’들을 희생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이런 일상은, 이런 양육은 행복하지가 않다. 양육자들이 자기만의 시간을 요청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런데 왜 양육자가 되면 ‘양육자’라는 이름에 다른 ‘나’들이 희생되는 걸까? 현실이들의 이야기에 제도씨가 답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많은 양육자들이 양육을 ‘희생’으로 느끼는 이유는 희생할 수밖에 없도록 양육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양육 전담자(전업주부 엄마)가 있는 아동을 기준으로 운영되는 보육제도, 아이는 안 돌보는 남성 노동자(생계부양자 아빠)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노동환경, 그리고 이 두 가지 모두를 지탱하는 배경인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 게 바람직하다’는 성역할 고정관념 때문에 ‘양육은 엄마의 희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희생이 아닌 양육이 가능하려면 보육제도와 노동환경의 전제 자체를 바꿔야한다.
희생이 아닌 양육을 위해
이런 현실이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고하고, 제도씨에게 묻기 위해, 11월 18일 <보육의 오늘을 말하다, 내일을 그리다>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에서는 남성육아휴직 일반화를 위한 적극적 조치, 점심시간유급화와 휴가확대3), 어린이집 입소대기문제 해결, 보육시간 편법운영을 막기 위한 기준보육시간제 도입, 보건소 거점의 아픈아이돌봄센터 만들기4) 어린이집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어린이집을 양육자들에게 여는 정책5) 등이 제안되었다.
또 토론회에 다 담지 못한 수다회의 이야기들을 담아 <당신을 응원하는 책, 아이보다 엄마가 더 중요한 육아서: 괜찮아>라는 소책자를 만들었다. 소책자는 ‘뽀로로에서 김후라이, 수족구까지’ 애 키우는 현실이들의 일상다반사를 키워드로 정리한 [2013 양육생활백서], 애 좀 키워본 언니들의 육아 상담실 [괜찮아], 남편과 육아나누기 4단계프로젝트 [암호명 팀플레이], ‘전업맘 아이가 직장맘 아이보다 안정되어 있다 카더라’ 등 양육에 대한 통념들을 전문가 자문단이 검증하는 [Dr.보육]으로 구성되었다.
양육자들의 수다회에서 시작한 이 사업은 이렇게 ‘현실을 담아 근본을 바꾸는 정책들’과 ‘공감과 지혜를 담은 대안적인 육아서’로 갈무리되었다. 애 키우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바빠서 한 데 모여 수다를 떨 여유 내기도 쉽지 않다. 모이기 어려웠던 만큼 한 번 모인 그 자리의 힘은 세고 따뜻했다. 이 결과물들을 통해 그 힘들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래본다.6)
1) <보육, 현실이가 제도씨에게 묻다>는 본부지부 공동사업으로 진행되어 고양파주, 남서, 동북, 원주, 인천, 진주, 춘천 지부가 함께 지역별 수다회와 캠페인, 강의, 토론회, 말하기 대회 등을 열었다. 본부에서는 양육자들의 릴레이 수다회(5~10월), 여성주간 거리캠페인 <애 키우기 힘든 덴 다 이유가 있다>(7월 첫 주), 수다회 분석결과를 담은 정책토론회(11/18), 모성신화를 넘어선 대안적 양육서 발간(11/18)을 진행했다.
2) 더 자세한 이야기들은 민우트러블(htpp://womenlink1987.tistory.com/)에 연재된 수다회 후기를 참고
3) 표준 노동자 상을 ‘일만 하는 인간’이 아닌 ‘관계를 돌보는 인간’으로 바꾸는 제도들. 특히 남성육아휴직을 위한 적극적 조치를 통해 남성의 육아 경험이 일반화되면 전사회적으로 ‘애는 엄마가’라는 모성신화가 그저 통념일 뿐임을 학습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수다회 중 남성육아휴직 경험자들은 ‘아이가 엄마보다 아빠를 먼저 불렀다’, ‘엄마랑 아빠가 있으면 아빠가 재워줘야 잠을 잔다’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전했으며, 아이가 애착을 형성하는 시기에 육아휴직을 하고 양육을 전담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했다고 전했다.
4)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보육제도의 기본 중의 기본인데, 한국의 보육제도에는 이 기본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또 아이가 아픈 상황도 양육자라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상황이니 보육제도가 보편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마땅하다.
5) 현재 어린이집은 문 밖에서 초인종을 눌러 현관에서 아이를 만나 데려가게 되어 있다. 범죄자 등 낯선 이의 침입을 막기 위해 어린이집 관리감독 기준으로 규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절대 들여다 볼 수 없는 공간에 누가 아이를 신뢰하며 맡길 수 있을까? 신뢰 회복의 첫 걸음은 어린이집에 양육자들이 들어가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안전 부분은 다른 대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6) 수다회 영상과 토론회 자료집, <괜찮아> e-book은 민우회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