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일]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라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라 김선희 : 여성노동센터 회원 내 몸에 좀 더 많은 용도를 부여해 주고 싶어 '걷자'고 작심한 출근길. '그래, 만리장성도 돌 하나로 시작했지!' 하며, 주먹 불끈 쥐고 "화이팅!"을 외치려는 순간, 주먹 불끈 쥐어 올리려던 손 다시 내려놓으며 스스로에게 한 말. 천천히, 여유 있게, 욕심부리지 말되,
'기대보단 못하고 걱정보다는 나은 사람 사는 일'에서, 다짐하며, 우아하게 남대문에 들어섰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허름한 차림새의 군상들. 인력시장이다. 예전에는 남자들뿐이었는 데 요즘에는 여자들도 제법 있다. "야, 한국말 할 수 있어?", "너, 뭐 할 수 있어?" 흥정하는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지나가는 마음이 편치 않다. 나의 출근길이 여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권을 확보한 사람과 확보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리라. '노동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데, 그보다 전에 노동을 할 수 있는 기회의 유무만으로도 사람은 정말 달라지는 거구나. 노동시장 한 구석에 자리차지하고 눈치밥이나마 먹을 수 있는 나는 정말 행운아구나. 사무실에 들어선다. 온갖 현안에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한다. 여성부문을 담당하는 나는 최전방에 투입된 총알받이다. 승진을 주장하면 "일도 못하면서...", 승격을 주장하면 "검증절차를 거쳐야..." 아침나절의 폼생폼사하던 나는 어디로 가고, 상처받은 어린 양이 되어 '아'하면 '어'하고 찰떡같이 반응해 줄 이를 찾아 헤맨다. 그 헤매임 끝에 확인하는 건 정서적 공감은 같은 젠더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동일한 젠더적 감수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정서적 교류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를 현실적 힘으로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은?' 머리 싸매 보지만, 별 뾰족한 답은 종내 떠오르지 않는다. '하긴, 니 머리 가지고... 그렇지만, 머리는 빌릴 수 있다고 했겄다, 머리 빌려줄 사람을 찾아 돌격! 앞으로. 얼마 전에 오노 요코전을 보러 갔었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라' 전위작가의 예술관이다. 요코를 둘러싼 세상 못지않게 나를 둘러싼 세상도 견고하기만 하다. 혹시 내게도 필요한 일이 아닐까? 그렇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는 걸까?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이 아닐까? 세상이 내게 부여해 준 정체성, 여성 그리고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그러면 세상이 바뀌든 내가 바뀌든 하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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