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더빙모니터링보고서 1] 그 여성들이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외화더빙모니터링보고서 1]
그 여성들이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들어가며
유명한 농담이 있었다. 영화 [링]의 한국판에서 여성인 신문기자 선주(신은경 분)는 했으나, 남성인 최열(정진영 분)이 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라는. 영화상 정답은 다른 사람에게 문제의 비디오 테잎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선주는 살았고, 최열은 의문사를 당한다. 그러나 이 농담의 정답은 다르다. 답은 바로 존댓말. 선주는 최열에게 존댓말을 사용했지만, 최열은 그렇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선주와 최열이 서로에게 사용하는 언어의 격이 달라야 할 이유나 맥락은 없었다. 그들은 신문기자와 부검의로 만나서 함께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사이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성인 선주는 남성인 최열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고, 최열은 선주에게 반말을 사용한다. 이걸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이런 일이 비단 이 영화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무심코 보아 넘기지만, 많은 영화 속 그녀들은 선주의 모습, 그대로다. 한국 영화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외국 영화들이 번역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습관들은 고스란히 반복된다.
외화다시보기모임에서는 이러한 무의식적인 습관에 제동을 걸기로 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같은 영화를 두 번, 세 번씩 보면서 영화에서 사용되는 언어상의 성차별을 모니터링하기로 하였다. 대상 영화는 공중파 방송사를 통해서 방영되는, 영어로 제작된 외화로 한정하였다. 공중파 방송사를 선택한 이유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볼 것 같기 때문이고, 외화로 한정한 이유는 존대와 하대의 구분이 없는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결과를 살펴봄으로써, 번역된 한국어의 성차별성이 편견과 관행의 문제임을 선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어를 영어로 한정한 이유는 존대와 하대의 구분이 없는 대표적인 외국어이기 때문이며, 외화다시보기모임이 그나마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영어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모니터링한 영화는 9월 9일부터 10월 29일까지 약 2개월간 공중파 방송(MBC, SBS, KBS1, KBS2)에서 방영된 영어권 외화 27편이다. 목록은 다음과 같다.
<표> 영화목록
방송사 | 영화제목 | 방영일 |
MBC (총 11편) |
애프터 선셋 블레이드 2 미션 시카고 상하이 나이츠 80일간의 세계일주 투모로우 캐리비안의 해적 나비효과 언더월드 이탈리안 잡 |
2006년 9월 9일(토) 2006년 9월 16일(토) 2006년 9월 22일(금) 2006년 9월 30일(토) 2006년 10월 4일(수) 2006년 10월 4일(수) 2006년 10월 4일(목) 2006년 10월 6일(금) 2006년 10월 14일(토) 2006년 10월 20일(금) 2006년 10월 21일(토) |
KBS (총 8편) |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프리즈 프레임 파 프롬 헤븐 머시니스트 스타워즈 4 스타워즈 5 스타워즈 6 슈렉 2 |
2006년 9월 17일(일) 2006년 10월 15일(일) 2006년 10월 29일(일) 2006년 9월 16일(토) 2006년 10월 5일(목) 2006년 10월 6일(금) 2006년 10월 7일(토) 2006년 10월 8일(일) |
SBS (총 7편) |
트루 크라임 클린 턱시도 캣츠 앤 독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스토리 오브 어스 |
2006년 9월 23일(토) 2006년 10월 1일(일) 2006년 10월 3일(화) 2006년 10월 14일(토) 2006년 10월 20일(금) 2006년 10월 21일(토) 2006년 10월 29일(일) |
이 영화들을 모니터한 결과, 성차별적 번역의 문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가장 친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남녀 간의 부부 혹은 연인관계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에게 사용하는 언어에 불균형이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역할과 성격을 표현하는데 쓰여지는 도구로서의 존칭여부가 남성과 여성에게 달리 적용된다는 점이다. 셋째는 남성은 하오체, 여성은 해요체로 서로 다른 높임법이 쓰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들을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남편은 반말, 부인은 존댓말?!
자, 첫 번째 문제제기. 가장 빈번한,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의 차이가 있다. 바로 부부관계 혹은 연인관계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존댓말을 그리고 남성은 여성에게 반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문제제기에 대해서 혹자는 부부관계 혹은 연인관계에서 흔히 남성이 여성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이 아니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되물으련다. 이승기 노래 “넌 내 여자니까”의 가사 (너라고 부를께, 누난 내 여자니까, 넌 내 여자니까)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여우야 뭐하니”의 철수(천정명 분)는 왜 9살 연상인 병희(고현정 분)와 연인이 되는 순간 늘 ‘누나’라고 부르던 병희에게 갑자기 ‘병희야’라고 부르는 거냐고.
남성들은 자신의 나이가 상대 여성보다 많건 적건 관계없이 반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모니터링한 외화의 번역에서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모니터링를 실시한 27편의 영화 중 남녀의 부부관계나 연인관계가 나오는 영화는 총 15편 모니터링 대상 중 55. 6%를 차지한 영화들 [애프터 선셋], [시카고],[투모로우], [캐리비안의 해적], [나비효과], [언더월드], [머시니스트],[슈렉2], [트루 크라임], [상하이 나이츠], [클린],[ 캣츠 앤 독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파 프롬 헤븐], [스토리 오브 어스]에서 남녀의 연인관계 혹은 부부관계가 등장한다. 이들 영화 15편 중 80%에 달하는 12편의 영화는 [애프터 선셋], [시카고],[투모로우],[머시니스트],[슈렉2], [트루 크라임], [상하이 나이츠], [클린],[ 캣츠 앤 독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파 프롬 헤븐], [스토리 오브 어스] 이다. 이들 영화에서 여성 배우자 혹은 여성연인은 자신의 파트너에게 존댓말을, 남성파트너들은 그녀들에게 반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표> 부부관계에서 성별에 따른 불균형한 대화의 사례
영화 | 원 대사 | 번역 대사 |
투모로우 |
남편 : I just saw that Sam got an F in calculus. |
남편 : 샘 성적표가 왔는데 알아? 미적분이 F야.부인 : 알아요. 성적표 봤어요. |
트루크라임 | 남편 : It's me, sweetheart. 부인 : Steve, thank God. Where are you? 남편 : I'm at the paper. They roped me in. 부인 : Oh no. Did they call you at the gym? |
남편 : 나야. 부인 : 세상에...지금 어디에요? 남편 : 일이 좀 생겼어. 부인 : 헬스클럽으로 전화했어요? |
대화는 상대적인지라 대화에서 사용하는 언어 역시 상대적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반말을 사용할 때, 남성의 그 언어는 사용자의 위치뿐만 아니라 듣는 여성의 위치도 결정한다. 내가 처음 보는 남성에게 존댓말을 사용할 때, 나의 존대는 내 인격의 훌륭함(^^;)을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 남성이 나에게 하대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 그 남성의 위치가 나보다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 남성이 나에게 반말을 사용한다면 그 순간 나의 위치는 그 남성보다 낮은 곳에 자리를 잡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서의 남성 파트너들은 반말을, 그리고 여성 파트너들은 존댓말을 사용함으로써 서로의 위치를 위계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부부관계 혹은 연인관계에서의 성별 권력관계가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결과이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관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또한 이들의 관계가 결혼이나 연인관계에 놓일 경우 남녀의 권력관계는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드러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강한 존재로서 적극적 · 주도적이(어야 하)고, 여성은 약한 존재로서 소극적 · 수동적이(어야 한다)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을 이끌고 여성을 보호하며, 여성은 남성에게 순종하며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인식된다.
특히 이는 이 둘이 가장 친밀하게 관계를 형성하는 부부관계 혹은 연인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온갖 이벤트로 무장한 프로포즈는 남성이 여성에게 해야 한다는 생각, 남성 파트너가 여성 파트너보다 나이가 많은 것이 자연스럽다는 생각, 맞벌이여도 남편이 부인보다 월급이 많아야 집안이 편안하다는 생각, 남편은 아내에게 호통칠 수 있어도 아내는 남편에게 큰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등은 이러한 성별 위계의 반영이다. 그 무의식 속에 깊이 자리한 성별 관계에 대한 인식이 여성은 남성에게 존대를, 남성은 여성에게 하대를 하는 것이 당연하게 표현되는 번역으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이승기와 철수는 연상의 여인과 연인관계를 성립함과 동시에 ‘너’라고 불러버림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존대와 하대를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나이마저 훌쩍 뛰어넘어버린다. 그러나 영화 속 여성들은 그렇지 못하다. 성별은 나이보다 힘이 세다.
외화다시보기모임 | 외화다시보기모임’은 여성주의영어자료읽기위원회 바닥의 회원 중 외화 번역상의 성차별성 모니터를 위해 9월부터 11월 중순까지 꾸린 단기소모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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