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문] 5회 밤길되찾기시위 '달.타.령' 선언문
[5회 밤길되찾기시위 선언문]
성폭력의 위험에 대해 ‘무기력함과 공포’가 아니라 분노와 재기발랄함으로 여성들의 권리를 외쳐온 달빛시위가 올해로 5년째이다. 5년 동안 달빛시위는 성폭력이 ‘남성의 어쩔 수 없는 성욕’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차별적 문화의 결과임을 알려왔다. 그리고 성폭력의 위험을 강조하며 밤길을 조심하도록 충고하는 것이 ‘성폭력’을 빌미로 여성의 성과 몸을 통제하는 것임을 드러내왔다.
최근, 아동 성폭력 피해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다시금 이 사회는 성폭력에 대한 공포증을 앓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응이라고 내놓는 정부 정책은 성폭력 근절의 길과는 한참 멀어보인다. 가해자 엄벌주의라는 정부의 임시 방편은 성폭력을 발생시키는 성차별적 규범과 문화에 대한 혁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는 ‘성폭력 근절’의 미션을 더 이상 그들의 손에 맡겨둘 수만은 없다. 우리들의 몸과 성을 제멋대로 규정하는 ‘여성성’을 단호히 거부하며, 우리의 손으로 밤길을,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부를 권리를, 우리가 제안하는 성폭력 근절의 현실적인 방향과 내용을 되찾을 것이다.
“달.타.령-달빛 타고 노는 영희”
초등학교 교과서 초반부에는 철수와 영희, 바둑이가 등장한다.
영희 : “철수야 안녕? 바둑이도 함께 놀자”
철수 : “영희야 안녕?”
단정한 옷차림에 귀밑 3cm의 단발머리를 한 영희는 교과서에 등장하는 국민 여동생이다.
그럼, 여학생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가? 깨끗한 교복과 베이비 로션 향기,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그런 것들이 우리 영희에 대한 이미지를 선점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영희는 어떤가?
과연 우리의 ‘여학생’ 시절이 모두가 생각하는 이미지처럼 그러한가?
시끌벅적한 교실, 교복 치마 안의 체육복, 격렬한 수다, 땀 냄새, 왕성한 식욕 그리고 은밀한 성욕. 결코 식지 않는 ‘관계’에 대한 질문과 고민들. 이 모든 복잡한 귀여운 것들로 구성된 우리 여학생 시절은 혼란과 자유로움의 시기이며, 동시에 성차별적 문화와 투쟁하는 시기이다.
철수 : 영희야 안녕?
영희 : 글쎄~
글쎄? 그렇다. 말 그대로 ‘글쎄’다. 우리의 영희의 생활은 그렇게 안녕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 시기는 영희를 ‘여성다움’이라는 성역할과 성별 규범에 끼워맞추려는 음모가 작동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영희에게 여자의 성은 위험하고 보호받아야할 것, 한번 깨지면 돌이킬 수 없는 ‘유리’같은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여성 연쇄 살인범’에 대한 뉴스는 영희에게 공포감을 조장하며, 사람들은 이런 험한 세상에서 영희를 보호할 방법은 ‘통제’라고 믿는다. 집에서의 통금시간이 영희의 귀가 시간을 옥죈다.
하지만 우리의 영희는 사람들이 믿고 바라는 이미지처럼 단정하지만도, 깨끗하지만도, 순수하지만도 않다. 다만 때로 분노하고 자주 즐거우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여성이다. 자신의 성별로, 자신의 나이로 자신의 삶과 일상이 통제받기를 거부하는 여성이다. 영희에게 성폭력은 ‘맞서 싸울 무언가’이지 ‘나를 위축시키는 공포 그 자체’가 아니다. 왜냐? 영희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확신, 그리고 성별 제도에 기대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려는 꼰대들과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가진 여성이기 때문이다.
철수 : 영희야 안녕?
영희 : 철수야 안녕? 바둑이도 함께 놀자
영희는 ‘안녕하니? 잘 들어갈 수 있겠어? 오빠가 데려다줄까?’라는 철수의 제안을 가볍게 튕긴다. 오히려 철수에게 ‘당신 안녕이나 걱정하세요. 나는 바둑이랑 놀거야’ 라며 무안을 준다. 성폭력은 여성들에게 든든한 오빠나 아빠가 있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보호'만을 외치는 오빠나 아빠는 밤길에 대한 무기력함을 학습시켜 오히려 영희를 성폭력에 더 취약한 존재로 만들 뿐이다. 오히려 성폭력은 70%이상이 아는 사람에 의해 일어나며,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 가해자인 경우도 허다하다. 자신의 일상을 성찰하지 않으면서, 성폭력이 사라지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희는 철수와의 관계에서 의존적이지 않기를 선택한다.
영희와의 오랜 우정과 파트너쉽을 맺어왔던, 영희와 함께 고된 몸 훈련을 겪어낸 바둑이는 이제 ‘도사견’급의 탄탄한 몸과 마음을 갖게 되었다. 자유로운 몸과 영혼의 영희에게는 바로 바둑이와 같은 파트너가 필요했다. 함께 있지만 자신의 신체적 안전을 결코 상대에게 양도하지 않으며 함께 각자 삶의 길을 걸어가는 것.
자, 2008년 달빛 시위에는 세상의 모든 영희들이 온다.
여성의 야한 옷차림이 성폭력의 발생 원인이라는 통념을 가뿐하게 넘어서고,
여성은 약하기 때문에 든든한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거짓말을 폭로하며,
자기 주장을 당당히 펴는 여성은 피해자가 아니라는 꼰대들을 비웃으면서.
달빛 타고 노는 영희, 우리는 이미 강하고 행복하며, 자유롭다!
- 2008.07.04 5회 밤길되찾기시위 참가자 일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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