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현실에 눈 감은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안), 정부는 여성의 목소리부터 들어라.
여성의 현실에 눈 감은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안),
정부는 여성의 목소리부터 들어라.
정부가 제2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정책수혜 대상을 늘리고 일-가정 양립 정책을 강화했다며 지난 1차 계획에 비해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발표 직후부터 여성단체와 시민/사회 단체, 진보정당들은 2차 계획(안)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일-가정 양립 대책이나 출산과 양육 지원 등 대부분의 정책이 아이를 키우고 있는, 또 출산 의지가 있는 여성들의 현실을 바꾸기에는 실효성이 없으며, 국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심혈을 기울여 정책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안)은 거시적 방향에서나 구체적 정책에서나 여성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저출산 경향이 보여 주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정부는 한국 사회의 급속한 고령화를 걱정하면서 저출산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부는 저출산 현상의 원인으로 첫째로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을, 둘째로 일-가정 양립이 어려운 환경을, 셋째로 경제적 부담과 양육 인프라 부족으로 꼽고 있다. 그런데 그 자체로 타당한 원인 분석과는 달리 정부의 계획은 이러한 근본 원인들에 대처하는 내용이 아니다.
'88만원 세대'로 표상되는 청년실업과 빈곤, 불안정노동의 일상화, 최저생계비도 못 미치는 최저임금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현실,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의 부재와 부족하기만한 복지제도,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 현상 속에서 국민들의 삶의 불안정성은 매우 높다. 불안정한 삶 때문에 출산 의지가 있는 이도 출산을 포기하는 형국이다. 정부가 저출산 현상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미시적인 정책도 필요하지만 국민들의 삶의 조건들을 성찰하고 사회 전체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거시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정부 계획은 원인을 분석해 놓고 이러한 원인들에 대처하는 정책은 뛰어넘은 채 부분적인 제도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역할 고정관념을 넘어 성평등 하지 않은 일터를 바꾸는 것이 우선.
한국 사회의 여성들은 성평등 하지 않은 일터와 성평등 하지 않은 가정에서 이중고를 겪고 있다. 고용불안과 열악한 노동조건, 무력화된 노동기본권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70%가 여성이다. 고용과 임금, 승진 등에서의 차별과 직장 내 성희롱 등 다양한 고통을 겪고 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가사노동과 육아는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로 인식되고 있으며, 정부가 분석한대로 맞벌이 가정에서도 남녀의 가사노동 시간은 커다란 격차를 보이고 있다. 육아휴직은 남성에게도 보장되어 있지만 실제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남성은 거의 없다. 이런 현실이 출산 의지가 있는 여성이 출산을 단념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정부는 일터와 가정, 사회 곳곳에서 어떻게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모순을 개선할 것인지를, 즉 성평등 수준을 높이는 것을 우선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일-가정 양립을 지원한다며 정부가 내놓은 대책을 보자. 우선 육아휴직 제도 개선의 핵심으로 육아휴직급여 정률제를 내 놓았다. 그러나 급여 문제 이전에 정규직, 비정규직을 막론하고 육아휴직 자체를 사용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여성에게는 임신과 출산 자체가 해고 사유로 작동하고 있다. 여성이 육아휴직을 마치고 직장으로 돌아가기란 매우 힘든 현실이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같은 이유에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까지 더해져 남성이 육아휴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기에 비정규직노동자의 고용보험 가입율은 30%대에 불과해, 육아휴직사용비율은 더욱 낮아진다. 이에 고용보험의 가입율을 높이기 위한 정부의 대책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설령 고용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하더라도 기간을 정하여 고용된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는 본질상 안정적으로 육아휴직을 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체노동자의 50%를 넘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고용에 대한 아무런 위협 없이 산전후휴가와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하면, 정부 대책의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물론, 육아휴직급여의 현실화를 넘어서는 기업문화의 혁신과 제도의 뒷받침,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소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마련은 마땅히 기본이어야 한다.
또 산전후휴가 분할사용 허용을 추진하고 있다. 이 내용은 오히려 출산여성의 건강을 침해할 수 있다. 산전후휴가를 연속 90일로 규정한 것은 이 기간이 출산여성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전후휴가의 기본 의미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부족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오히려 임신 초중기에 필요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추가로 휴가를 쓸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일-가정 양립 대책의 다른 큰 줄기는 노동시간 유연화와 단시간 일자리 확대, 유연근무제 확대 정책이다. 정부는 여성들이 아이 돌볼 시간을 배려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여성노동자의 일자리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고 주변화 시키며, 동시에 가족 내 돌봄의 역할을 또다시 여성의 몫으로 강화하고 있다.
저출산의 원인은 위에서도 보았듯이 소득과 고용의 불안정성이며, 양육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다. 여성들은 적정한 임금 수준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원하고 있다. 이미 여성들의 일자리가 비정규직, 저임금 일자리로 채워진 현실에서 정부는 여성들에게 저임금 단시간 노동을 더욱 권장하고 있다. 또, 육아기 근로시간 계좌제는 육아를 지원한다는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초과노동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설사 하더라도 초과노동의 댓가를 지급하지 않겠다는, 노동권을 침해하는 발상이다.
정부 계획 대부분은 남성 노동자에 대한 고려 없이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정말로 여성들이 일터와 가정에서 만족할 수 있으려면 일터에서의 성차별을 줄여 나가는 것과 함께 가정에서도 남녀가 가사와 육아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를 위해 성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고 국민들의 성평등 의식을 높이는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 OECD국가 중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현실을 즉각 개선해야 한다. 여성의 노동시간만 차별적으로 줄이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후퇴 없는 노동조건을 전제로 한 실질 노동시간 단축이 더욱 필요하다. 그래야 남성들이 양육과 가사를 분담할 수 있는 조건 역시 마련될 수 있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결혼장려, 차별과 배제를 낳는다.
정부는 출산 환경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남녀간의 결혼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결혼 기피, 만혼부터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들 또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결혼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사회, 경제적 불안정성 때문에 결혼을 늦추거나 하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최근에 저출산을 해결하겠다며 대규모 미팅 행사를 열었다. 이번 계획에는 결혼정보를 체계적으로 제공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여기에서 정부의 고민 수준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결혼율이 높아질 수도 없으며, 결혼만 하면 무조건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보는가.
결혼 여부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선택이며, 결혼 장려 정책과 기혼자에 대한 우대는 다른 이에게는 차별과 배제로 작용할 수 있다. 또, 자녀는 과연 결혼한 아버지와 어머니로 구성된 이른바 '정상가족'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가? 이미 우리 주변에는 결혼하지 않고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비혼모들이 있으며 이성커플이든 동성커플이든, 결혼을 여부를 떠나 아이를 가질 수 있다. 다양한 관계와 가족형태를 무시한 채 집행하는 결혼 장려 정책은 현실에 대한 무시이며 차별을 만들어 낸다.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을 원하는데, 자율형 어린이집?
아이를 키우는 여성과 남성들은 한국 사회의 살인적인 사교육비와 보육 비용에 대한 부담이 크다. 양육자들은 보육에 국가가 더 많은 지원을 확대해 주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국공립 보육시설확충에 대한 욕구가 높다. 그러나 정부의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 계획은 취약지역에만 한정되어 있으며 민간보육시설에 대한 평가인증제를 통해 보육료를 자율화하겠다고 한다. 이럴 경우 이른바 '명품 어린이집'의 탄생이 불가피하며 보육의 양극화를 불러올 것이 뻔하다. 베이비시터 시장 창출 역시 국가의 역할을 강화하기보다 시장에 내맡기겠다는 태도다.
고령사회 대처보다 출산율에만 집착, 국민은 계몽의 대상인가.
정부는 급속한 고령화로 인해 노동력이 줄어들고, 사회보장 지출이 늘어나며 세대간 갈등이 커질 것이라며 우려한다. 그렇다면 우선 시급한 것은 고령화 자체에 대한 대책이다. 적절한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으면서 노인들의 노동 능력에 걸맞게 일자리를 나누는 것, 사각지대 투성이며 OECD국가들에 비해 한참 부족한 사회보장을 강화하는 것에 우선 집중해야 하지 않는가. 거액의 국가재정이 투입되는 불필요한 사업을 포기하고 그 예산을 사회보장을 강화하는 데 쏟는 것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는가. 대국민 공청회에서도 정작 고령화에 대한 대처 계획은 별로 없다는 질타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정부 계획은 고령화 대책보다 출산율 제고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이 계획의 주축은 결혼과 출산 장려 운동이다. 정부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하는데 애를 쓰겠다고 한다. '아이낳기 좋은세상 운동본부'의 구성과 경진대회, 지자체 평가 등 사실상 '대국민 계몽 운동'이 주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정부의 이런 태도는 과거 군사정권이 그러했던 것처럼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스럽다. 정부는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우선해야 하지 않는가?
아이낳기 좋은세상 운동본부의 활동 계획에는 종교계를 활용해 불법임신중절 예방 캠페인을 벌이는 것도 있다. 2009년,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여성들의 임신중지만 막아도 출산율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란 요지의 발언을 했다. 올해 초 임신중절을 범죄화 하려는 시도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도 보건복지부는 여성들이 임신을 중단하는 사회경제적 이유에 대해 성찰하고 대안을 내놓기보다 불법인공임신중절 신고센터 개설, 인공임신중절 예방 사회협의체 구성 등 처벌과 단속 위주의 정책을 폈다. 이렇게 여성들의 구체적인 삶과 현실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태도는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에서도 드러난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처음부터 다시 들어라.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저출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국민들의 삶의 불안정성을 해결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방면에서 복지 체제를 마련하고 이에 걸맞는 재정 투입이 필요하다. 현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4대강 ‘죽이기’ 사업과, 부유층에 대한 감세 정책을 중단하고 복지 예산을 늘려야 한다. 또한 전 사회적인 성평등 수준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령화에 대처하기 위한 기반이 마련되고 우리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가 된다면 출산 의지가 있는 여성이 출산을 포기하는 경향은 자연스럽게 달라질 것이다.
정부는 여성들의 요구를 계속해서 무시하고, 듣지 않고 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에 대한 대책에는 묵묵부답이면서 반노동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고, 보육과 돌봄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확대하라는 요구에는 시장화와 자율화로 답하고 있다. 사회적 이슈인 성폭력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의 성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조치보다 실효성 없는 처벌정책만을 앞세우고 있다. 정부는 한 차례 대국민공청회를 끝으로 저출산 고령사회 위원회와 국무회의를 거쳐 10월에 계획을 확정할 예정이다. 공청회 자리에서 수많은 비판들이 쏟아졌고, 정책의 기본철학부터 지적받고 있다. 국민의 소리를 듣지 않고 일방적인 정책을 펴는 현 정부의 기조를 저출산 고령사회 계획안 역시 답습하고 있다. 정부는 저출산 고령사회 계획안의 추진을 전면 중단하고 여성들의 목소리를 처음부터 다시 들어야 한다.
2010년 9월 20일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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