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다지기 2호 2002. 8.>

[나/의/삶/나/의/일]

서른 아홉 가을의 새로운 시작

진순희::여성노동센터 회원(논술교사)

오늘 수업을 하면서 한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난 여기 오면 자유를 느껴요. 나를 생각해 보고 사회가 돌아가는 일을 알고 말할 수 있어서 시민이 된 느낌이에요.'
중3 여자아이의 입에서 '시민'이라는 말이 흘러 나왔다. 시민이라구? 시민 단체도 아닌데... 그럼 내가 시민을 양성했단 말인가?
내가 논술교사가 된 것은 늘 가까이 없었던 남편과 연관된다.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달라고 애원도 하고 협박도 해봤지만 남편은 야외촬영을 핑계로 산으로 물가로 야생마처럼 내달렸다. 난 토요일이면 집 가까이에 있는 국립도서관으로 아침 일찍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처음으로 가족 열람실이라는 것이 생겨서 영화도 보고, 책도 보고, 컴퓨터를 할 수 있었다. 가족으로서의 끈끈한 유대감을 확인하면서 우린 늦게 까지 책을 보다가 별을 보며 내려오곤 했다.
몇 년 동안 반복된 그 당시의 많은 독서와 문화생활은 현재 논술교사 일의 밑바탕이 되어 일하는데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환경을 마련해 주어서인지 아이들은 책읽기를 좋아하여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내 아이들과 함께 팀을 짜서 수업을 한 것이 논술교사의 시작이였으며, 그 때가 내 나이 서른 아홉의 가을이였다. 마흔을 바로 눈앞에 두고 말이다.
'풀꽃과 친구가 되었어요'를 읽고 풀꽃을 그려보고, 사진 찍고, 백과 사전을 찾아 정리해 보고, 신문 속의 미담 주인공에게 편지도 써보면서, 나라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하는 시간도 가졌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얻는 것이 더 많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읽으면서 한 생존자의 삶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을 느낄 수 있었고, <나쁜 어린이표> 동화를 읽곤 주인공이 되어 눈물 흘리고, 책 속의 교사처럼 아이들의 세심한 감정을 놓치는 부분은 없는지 반성도 하게 되었다. 신경림의 시집 <뿔>에 실린 <떠도는 자의 노래>를 읽고는 굶주렸던 시절의 무의식이 DNA에 각인된 것도 아닐텐데 허기와 욕망에 갇혀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나를 표현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려왔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는 구절은 두고두고 뇌리에 남았다.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내용도 날카로웠지만 서문에 쓰여진 것이 일품이었다. '샘물이 높은 바위 틈에서 흐느끼고, 햇빛이 푸른 손에 차갑기만 한' 시(詩) 속 산수의 풍경을 관악산과 도봉산에 오르면서 필자는 벅찬 감격을 느꼈다고 한다. 실제 북한산에 오르면서 샘물이 흐느끼는 계곡을 몸으로 부딪힐 수 있었다.
외형과 실용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근본과 기초를 외면하는 시대에 독서를 통해 자기 주장을 논리적으로 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알찬 인생을 위해서는 초행길의 나그네처럼 유익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인생의 안내판은 세상 속에 말없이 떠돌며 보이지 않게 존재한다. 인생의 안내판을 해독할 능력을 키우기 위해 역사, 철학, 과학 등 기초학문을 독서를 통해 단계적으로 훈련하게 하는 나의 직업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가치 있다고 생각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갖지 않았다면 긴장 속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을까? 서러움과 슬픔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 나를 구원해 주는 직업이 될 줄은 몰랐다. 가르치는 일이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 스스로 성장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또래 친구들처럼 다이어트에 신경 쓰고, 아이들을 좋은 학원 보내기 위해 정보수집하러 혈안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직업은 경제적으로 윤택함을 주었고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었다. 아울러 정신적인 자유까지 안겨 주었다. 나는 나의 직업을 사랑하고 긍지를 느낀다. 열정이 식을 때까지 이 일을 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 난 오늘도 산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