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다지기 5호 2003. 2.>

[회원의노동생각]

백수선언

정승림:: 여성노동센터 회원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고 생활하기 힘든 요즘, 각 사이트들을 이용하기위해서 많은 경우 회원가입의 절차를 거쳐야한다. 여지껏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줄잡아도 수십개의 사이트에 이미 회원가입을 했고, 주민번호니 전화번호니 하는 신상공개를 찜찜한 마음으로 순순히(?)적어넣고서도, 또하나 쉽게 넘어가지 못하는 것 중의 하나가 '직업선택'란이다.
회사원, 금융/보험, 무역/ 정보통신/.....등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봐도 내게 적절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맨끝엔 이렇게 써있다. '기타'.

백수의 사회학 '기타'?? '기타'는 사람에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매번 내맘대로 '예술인'에 체크를 하면서 마음을 달래지만 생각할 수록 불쾌하긴 마찬가지다. 도대체 그일이 무엇이 되었건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돈으로 그 댓가를 얻는 일을 하지 않으면 곧 무의미해지는것. 소위 '백수'생활을 하고있는 난, 사회의 떨거지이다. '기타'라 불리우는 종족이 존재하는 사회, 이곳에서 냉소와 무관심은 필수 덕목이며 누가뭐래도 '기타'들은 차별 받는 존재이다.

'백수'라는 말은 백수건달(白手乾達)에서 유래되었는데 '백수'란 수중에 돈 없는사람을, '건달'은 하는일 없이 빈둥거리고 놀거나 게으름 피우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간단히 말하면 사지멀쩡하면서 돈벌이와 상관없이 사는사람이다. ('빈둥'이니 '놀이'니 '게으름'이니..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은 모조리 바보취급당하는걸 보면 난 떨거지중에서도 골수인가보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백수'는 예전의 의미에서 변형되어 유머를 섞어 젊은 층의 실업자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예가 90년대 초반 일본의 '프리터(Feeter : free+arbeit+er)'이다. 이것은 직장없이 갖가지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는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新造語)로,(물론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더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탄생의 배경은 우리나라의 '백수'처럼 '경제불황'이라는 사회 구조에 근거한다. 그런데 자유(Free)라니.. 얼토당토 않다. 스스로 인정하기 싫을뿐, 백수라는 이름의 실상은 경제적 불황이 가져다온 수많은 젊은실업자들을 자족시키려 위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아직도 내가 남들에게 '나 백수예요' 라며 농담처럼 흘려버릴 수 있는 데에는 이런 사회적 합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백수를 자발적 선택이라 하는가! 경제적인 개념에서 인간은 경제활동인구( Economically active population)과 비경제활동인구(Not Economically active population)로 나뉜다. 그런데 비경제활동인구의 정의를 살펴보면(아래 각주) 여기에 많이 낯이 익은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기타'!! 두둥~!! 사실 '실업자(Unemployed person)'는 어찌됐건간에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한 사람으로 즉시 취업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의 '백수'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보다 눈여겨 보아야할 것은 실업자보다는 비경제활동인구 중의 '기타'이다. (별로 좋지도 않은 말인데 자꾸만 여러번 쓰다보니 정감이 느껴진다.. 윽. -.-; )

OECD의 경제활동인구 총괄(단위 :천)에 의하면 2001년도에 비해 2002년에는 취업자가 늘고(21362→21884) 실업자가 줄어들어(872→718) 결과적으로 실업률이 감소(3.9%→3.2%)한것으로 나타났지만, 현실적으로는 취업을 포기하는 사람등이 늘어나 구직자들이 경제활동인구에서 비경제활동인구로 편입되어 정부의 실업통계에서 제외되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그리고 정부의 실업통계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은 곧 이들에 대한 대책이 정책적으로 뒤따르지 못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따라서 정책적인 관심 밖에 존재하는 '백수들'은 그들개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게된다. 이미 그들의 자발성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주위에 백수로 사는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더구나 여성의 경우 경제활동참가율이 저조하고(2001년 경제활동 참가율 전체 60.8% 중 남성 73.6% 인데반해 여성은 48.8% 에 불과하다 : 통계청, 경제활동상태및 참가율), 취업자도 줄어드는데다 정규직수 또한 줄어들고 있으니, '기타'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그나마 대책이 세워진다해도 언제나 그렇듯 '여성'이란 조건은 신규취업자들에 걸림돌이 될수도 있기때문에, 또 예산이 없다는 핑계 등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마련이다.

사실 생계에 대한 걱정없이 자유(?)롭게 내맘대로 하고 싶은일만하면서 살고싶은 마음이야 누군들 없을까마는, 일자리가 중요한건 경제적인 것 이외에도 불투명한 미래, 자신감상실, 사람들의 시선, 주변사람들과의 이질감 등등 개인의 심리와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주변의 인간관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즉 매인곳 없는 몸이라는것이 주는 달콤함이라는 명분에 가리워져 '기타' 인간들이 치뤄야만 하는 댓가는 은폐된다. 바꾸어말하면 '백수'집단을 양산하는 주체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람이 돈으로 밖에 보지못하는 사회 의식이며 또한 그들을 가차없이 밀어내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여성인 나, 거기다 백수인 나.
내가 일이 필요할 때 난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게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을 권리가 그들에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