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다지기 6호 2003. 4.>

[핫이슈]

호주제에 대한 나의 생각

함수진:: 노동센터 회원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마음에 맏아들 위주로 승계되는 호주제는 올바르지 못하다는 대의에 공감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호주제에 대해 절절히 생각해 보거나 호주제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도 알아보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 나와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상이 아닌가 한다.
그리하여 나에게도 호주제에 대해 불현듯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일은 상당히 불편하고도 불쾌스런 일들이 벌어지고 나서야 발생하고 만 것이다.
나는 외할머니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 쪽의 어른들이 친조부모이고 어머니의 부모님들은 외조부모라는 구분이나 장손이니 호주제니 하는 것들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었다.
그러던 어느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게 된 후 초상집의 북적거림이 가라앉기도 전에 드디어 드라마에서 볼 수 있었던 광경이 우리 집에서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다 함은 그 때까지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 영원히 떠난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가 없었지만, 실제로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당장 집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갈 것인가, 호주가 누가 될 것인가를 둘러 싼 불편한 잡음(내가 볼 때는 이것들은 분명한 잡음이다)들이 시작되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20여년을 떨어져 살던 외삼촌이 집의 소유권과 호주 승계의 원칙을 주장하였고, 할머니는 인정상 모든 소유권을 다 넘겨줄 수는 없고 딸에게도 좀 줘야 한다는 배려를 요청하는 것이 아닌가!!!
남겨진 집을 누가 가지고 얼마만큼 공정하게 분배할 것이냐의 문제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 놀라운 것은 그 상황에서 할아버지의 부인이었던 할머니의 위치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것, 아들은 그 상황의 주체가 되고 나머지 형제들은 인정상 배려를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법적으로 유산에 대한 분배는 유언장에 기초하거나 법적으로 배우자와 가족들에게 이럭저럭 분배할 근거들을 마련해 놓고 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 중에 유언장을 남기는 경우가 얼마나 되며 법적인 근거를 들어가며 격하게 나눠 가져야 할만큼 재산이 많은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 "소유권"과 같은 문제들은 관습과 상식에 의해 처리되며 남겨진 노인의 거취를 누가 돌볼 것인지 결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배분되는 절차와 그 결과의 공평성"이 아니라 관습과 상식에 의해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들이 어떤 위치에 서 있고 어떻게 "다뤄지는가"이다.
몇십년 동안 두 노인이 유지해왔던 것들이라면 당연히 그것의 소유와 처분은 두 분 중 남겨진 한 분에게 전적으로 권리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왜 몇십년 동안 부양이 아닌 독립된 삶을 살아왔는데도 당연히 아들의 위치로 모든 것을 귀속시키겠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 왜 호적 등본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할머니가 대장이 되어 자식들이 등록되는 것이 아니라 외삼촌의 호적으로 할머니가 이동해야 하는 것인가? 왜 아들 이외의 자식들과 본인의 것들은 명령이나 주장이 아닌 배려의 요청으로서 부탁되어야 하는 것인가? 왜 이런 것들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벌어지는 것인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잡음의 기간 속에서 내가 가장 절망한 것은 아버지, 아들에 비해 어머니와 딸은 당연히 낮은 위치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최근에 나는 법에 따라 외삼촌의 호적으로 이동한 할머니와 이제는 경제생활을 접고 본격적인 백수 상태에 진입한 부모님을 나의 직장 의료보험에 등록시키기 위해 서류를 가져다 낸 적이 있었다. 직장 의료보험에 부모님을 등록하는 일은 별거 아니지만 외조부모를 등록하는 것은 예외다.
할머니를 등록하기 위해 제출한 나의 아버지, 즉 할머니의 사위 이름의 주민등록등본에는 할머니 이름 옆에 전입한 "동거인"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으며 더불어 옆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호주로 적혀있다. 이 동거인이 뭔 뜻인지는 나도 동사무소 직원도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그 동거인이 나의 할머니라는 사실은 전혀 표시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보험공단에서는 이 사람이 나의 외할머니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머니 결혼 전 호적을 떼어와야 하고, 부양해 줄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어머니가 결혼해서 아버지 호적으로 들어왔던 혼인신고에 의한 법정분가 호적등본과 어머니가 결혼 전에 들어있던 돌아가신 할아버지 명의의 호적(사망신고가 되어 있으니까), 그 이름도 첨 들어본 제적등본이라는 것까지 떼어다 제출하였다.
이런 복잡한 과정보다 황당한 것은 아들의 부모는 주민등록등본이라는 공식 서류에 모든 것이 표현되는데 딸의 부모는 '부모 자식 관계라는 것과 부양해줄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그 발상이다. 아들의 부모는 당연하며 딸의 부모는 돌봐줄 이가 없거나 멀리 떨어졌을 때만 인정해 줄 수 있는 특별 경우란 말인가. 법적으로 재산권의 분배 따위를 운운하지만 공식적인 가족의 기본 단위를 법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이외에 인정하지 않은 그 발상, 진짜 이런 식으로 취급해도 되느냐 말이다.

자, 지금까지의 나의 얘기는 어떤 것으로 정리해야 하는 것인가... 호주제 폐지를 부르짖을만큼 처절한 피해사례인가? 핫핫핫... 천만에다... 호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얘기를 하면 가장 많은 질문은 호주제가 어떤 문제점이 있는 것인가요? 사실 거의 실효성이 없는 것 아닌가? 이다. 나는 호주제가 주는 불편함과 부당함을 무진장 발굴해서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는 제도이므로 폐지를 주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은 그런 식의 기능적인 접근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호주제가 거의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다소간의 이득이라도 있다면 그럼 호주제는 길이 길이 남겨야 하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불편함에 앞서 그것이 맞는 것인가에 대한 '원칙적 판단'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문제가 직접 발생하거나 혹은 피해사례들을 접하지 않는 이상 '원칙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 사고 방식'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특히 별로 피해본 것도 없으면서 왜 흥분하냐는 심드렁한 남성들과 얘기할 때 이런 사고방식은 극에 달한다.

문제점과 피해사례는 원칙을 드러내는 증거들 중 하나일 뿐이다. 때문에 호주제가 주는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줘야 뭔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의 원칙, 즉 공식적인 가족의 주인을 정하고 그 순서가 아버지와 아들의 서열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규정되어 있고 다뤄지고 있는지의 시비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나 타인의 경험을 통해 생각의 실마리를 얻었다면 사례의 충분함과 심각성을 운운하기에 앞서 지금까지 그냥 지나쳤던 "원칙"에 대해 다시금 판단해보는 그런 긴장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얘기는 한두번의 사건을 겪고 난 후에 '나와 가족을 구성하는 원칙'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일종의 반성문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