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다지기 3호 2002. 10.>

[추/천/합/니/다]

내 딸이 여자가 될 때

땡글이:: 여성노동센터 회원, 학원강사모임

27세의 '성인'이 되어 있는 나. 그리고 '성인'이라 불리우는 생활을 하고 있는 나... 하지만, 가끔 어디에서부턴지 모르게 내 삶이 뒤틀려 온 것 같은 느낌. 까닭 없이 아주 어렸던 옛날이 그리워지는 아득함... 그 동안 겪어온 혼란이 내게 없었다면, 난 아주 다르게 살고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가정... 이런 것들이 불쑥 불쑥 삶의 언저리에 튀어나오곤 하는 경험은 나 혼자만의 것일까? 상담치료사인 메리 파이퍼가 자신이 상담했던 10대 소녀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써내려가는 책 '내 딸이 여자가 될 때' 에서는 담담하게 얘기한다. 여성들, 혹은 여성으로 자라나는 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 하는 의지와 행동이라고.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딸과 여자들의 44가지 사례 연구'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기억의 어느 쯤엔가 희미해져간 나를 다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책 안에 등장하는 숱한 여성들과 함께 괴로워하고 느끼고 기억해내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고 난 후 나에게 남은 것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계속 입 속에 중얼거리던 한 마디였다. "난 나야!"

소위 사춘기 시절에 나는 참 똑똑하고 당당했던 것 같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 또는 눈 앞에 맞닥드린 상황에 유연하고 분명하게 대처할 줄 알았다. 학교 생활도 그럭저럭 잘 해나갔고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도 좋았으며,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의 이런저런 고민을 상담해주기도 했다. 내 주변엔 긍정적인 메 시지들이 항상 함께 했다. '어디다 내놓아도 걱정이 없다'느니..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배려심이 깊다'느니.. '적극적'이고 '활동적'이어서 공부든 운동이든 예술이든 못 하는 게 없다느니....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빠의 '욱'하고 권위적인 성미탓에 가끔 벌어졌던 폭력사태에, 뼈가 부러지고 피멍이 들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지만 열심히 살아온 신경증의 엄마에 항상 도망가고 싶고 환상 속에서 도피처를 찾아 헤매던 기억도 있다. 여느 아이들처럼 엄마처럼 살기는 죽어도 싫었고, 그래서 오빠들이 주먹질을 해대도 끝까지 부릅뜬 눈은 아래로 내리지 않았다. 밤새 악몽에 시달리고서도 학교에서는 아무런 그늘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족은 행복하고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애써 긍정하곤 했다.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30분 동안 머리 드라이를 해대고, 조금이라도 얼굴이 하얘 보이고 싶어서 존슨즈 베이비 파우더를 얼굴에 부비고서도 연예인을 부러워하는 아이들을 비웃으며 그런데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기도 했다.^^; 집안 분위기 탓이었을까? 어쨌든 나의 사춘기는 그럭저럭 여러 규율과 통제, 주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크게 엇나가지 않고 나름대로 사고 없이 평탄하게 흘러갔다.

오히려 나의 방황과 혼란은 대학시절에 시작되었다. 짤닥막한 키에 둥글납작한 외모, 하는 것마다 같은 남자동기와 비교되었고, 다른 남자동기들이 쉽게 인정받고 받아들여지는 만큼 나 자신이 인정받기는 쉽지 않았다. 성적이 좋은 것도 때로는 흠이 되었고, 나는 남자동기들의 도전을 나는 알 것 다 안 다는 식의 말투와 술로 이기려고 했다. 여중, 여고를 거치며 쌓아온 나의 노하우는 전혀 다른 방식의 반응으로 되돌아왔다. 잘 웃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남자 동기들과도 잘 어울리는 성격은 다른 이들에게 예전처럼 배려심이 깊다는 것보다는 남자들에게 헤프다 또는 잘 꼬신다는 반응으로 되돌아왔다. 어느 샌가 나는 내가 그리 외모가 출중하지도 못하며, 그리 잘난 것도 없고 문제를 잘 일으키는 사람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혹은 사회적인 메시지를 스스로 뼈아프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거침없이 내 생각을 말하던 나는 사라지고 위축되고 눈치를 보는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나는 환영받지 못했다. 예전처럼... 느는 것은 지독한 피해의식과 술, 담배였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에는 비싼 대가들과 오랜 시간들이 소요되어야만 했다.

왜 대부분의 딸들은 어린 시절의 안정성을 해치는 온갖 혼란과 위험 속에 노출되어야 하는가.. 메리 파이퍼는 모든 소녀들이 겪었을 또는 아직 겪지 못했더라도 언젠가는- 그것이 20대가 되었든, 그 이후가 되었든- 겪게될 이러한 과정을 '허리케인'으로 비유한다. 그리고 그 허리케인의 배후에는 개인적인 특성과 자질 이전에 모든 사람이 자기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이상적인 문화가 여성들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음, 그리고 여성으로서 온전하게 자신을 발달시킬 수 있는 모든 것들 대신 외모 중심의, 그리고 보조적인 위치에 머무르게 하는 온갖 사회적인 메시지들과 소위 여성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메리 파이퍼는 훈계하지 않는다. 그저 그녀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또는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뿐이다. 그리고 뒤따르는 것은 비난이 아닌 따뜻한 말 한마디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느꼈지?" "너는 무엇을 하고 싶지?" "어떻게 하는 게 너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와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허리케인 속에 있는 어린 딸들은 - 그들의 나이와 가정환경이 어떠하든간에- 대부분 자신이 감당하기 벅찬 수많은 사회적인 문제와 메시지들 그리고 여성성에 대한 강요를 한꺼번에, 너무나도 급작스럽게-예를 들면 중학교에 진학하는 시점에- 직면하게 된다. 문제에 노출되는 것은 대부분 진정한 자아를 부정하고 자기 내부의 전체성을 상실해가는 과정 속에서 벌어진다. 허리케인 속의 딸들은 이전처럼 사회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인정받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자신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아는 것도 모른 척하고, TV에 나오는 사실은 비정상적인 신체의 연예인들을 따라가고자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자신의 주장은 잊은 채, 다른 이들- 주로 남성들-의 입장과 태도를 긍정하게 되고, 열심히 자신을 낮추고 주변을 보살핀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학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혼란에 처하는 이들을 메리 파이퍼는 어머니와의 관계, 아버지와의 관계, 가족이라는 울타리, 섭식장애, 자살충동, 자기부정, 알콜중독, 섹스와 폭력 등 여러 가지 틀 속에서 생생한 십대들의 목소리로 전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회적으로 녹아있는 구체적인 성차별, 성폭력, 자아상실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고자 하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자립성과 자율성을 주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자 하는 가정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세상을 살아나가는 15세 이상의 모든 여성들이 한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몇 년 전과는 너무도 급속하게 변해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을 10대의 딸들뿐만이 아니라 성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모든 여성들이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인공들과 함께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 속에서 필시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나가는 여행에 자신도 모르게 동참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필자가 글의 마무리쯤에서 이야기하듯이 저항하는 자와 투쟁하는 자는 살아남는다. 지금의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의 내면의 세계와 생활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 것인지... 사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여성들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지 않는가. 우리는 여전히 '남북응원단'이 아니라 '남북미녀응원단'에 갈채를 보내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