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다지기 4호 2002. 12.>

[쟁/점]

끝나지 않은 싸움

박봉정숙:: 여성노동센터 사무국장

요 근래 몇 년간 우리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단어는 아마 '농협중앙회'일 것이다. 우연찮게도 농협중앙회(이하 농협) 본사는 민우회 사무실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다. 그래서 처음 소송이 시작되었을 때, 가끔 사측 사람들이 농협표 과일 쥬스를 손에 들고 느닷없이 방문하곤 해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였다. 사실 그다지 들을만한 이야기도 없었다. 복직을 시켜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잘못을 했다는 것도 아니고…. 그 당시에도 "왜 왔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들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안됐었는데, 지금 다시 떠올리니 참 웃긴다. 싱거운 사람들 같으니….
나에겐 농협사건 증후군이 있다. 길을 지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농협 앞을 지나게 되는데, 그냥 멀쩡히는 못 지나가게 된 것이다. 농협의 녹색 간판을 발견하게 되면 일단 기분이 나빠지고, 화도 좀 나고, 씁쓸하기도 하고, 여튼 뭔가 알쏭달쏭 기분이 드러워지는 증상.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뿌려지고, 욕을 스리슬쩍 하거나, 뒷발치기라도 한번 해야 속이 좀 시원해지게 되었다.
이제 당분간 그 회사를 멀쩡히 바라보려면 조금, 아니 긴 시간이 필요한 그런 이름이 되어버린 그 '농협' 이야기를 바보같이 오늘 또 시작한다.

여성노동운동의 적신호

경제위기 이후 '채용은 제일 나중, 해고는 제일 먼저'라는 약간은 자조 섞인 이 표현이 그 당시 여성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했다 싶을 정도로, '남성=생계부양자이데올로기' 광풍아래 여성노동자들은 낙엽처럼 쓸려나갔고, 87년 이후 여성노동운동이 쌓아놓은 고용평등의 자취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는 엄혹한 시국이었다.
그때까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던 금융기관에 대해서도 구조조정은 시작되었고, 금융기관 또한 이 광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무직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과 남녀평등한 제도 마련을 여성단체와 함께 선도적으로 이끌어왔던 금융계 여성노동자의 몰락(여성노동자의 대거퇴직, 급속한 비정규직화, 여성노동자의 조직력 약화)은 향후 여성노동운동의 적신호를 예고하고 있었고, 민우회 등 여성단체들은 이에 대한 위기의식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농협사건은 터졌다. 99년 1월쯤이었다. 민우회로 상담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사내부부인데요. 회사에서 구조조정의 대상이 됐어요….' 전화를 거는 사람은 어느 회사의 누구인지 절대 밝히려 들지 않았지만 그 회사가 어디인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국정감사시 이미경 의원은 농협 구조조정에 있어서 사내부부퇴직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라며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로 인해 노동부는 농협에 대한 특별 감사를 실시했다. 한편, 이미 이러한 사실들을 접한 우리들은 먼저, 농협의 노골적이고도 명시적인 여성을 타겟으로 한 구조조정 내용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여성우선해고의 결정판인 이 사건의 가시화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당사자들이 자신을 밝히지 않고 있어 가시화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나중에 변론에서 농협측 변호인인 김○○은 여성단체가 선동하여 그녀들이 소송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지만, 여성단체가 선동하여 소송에 나올 만큼 그녀들의 상황은 쉽지 않았다. 남편이 볼모로 회사에 잡혀 있는 상황. 용기를 내는 것은 모험이었다. 결국 노동부의 특별감독 결과는 '성차별 혐의 있음'이었지만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아 혐의만으로 그치고 만 채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고 있었다.

당사자들이 쉽게 법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도록 가족이라는 올가미를 씌워놓은 그들의 잔인성과 머리 좋음에 감탄하며 통탄하고 있을 즈음, 그녀들이 봄볕처럼 나타났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그리고 얼마나 그녀들은 씩씩하고 당당했던지, 그녀들을 사무실에서 맞이한 우리가 더 힘이 났다.
아마도 그때가 99년 4월쯤이었을 것이다. 그녀들은 퇴직 당한 후 계약직 사원으로 재고용되어 근무하고 있었다고 한다. (해고된 여성노동자중 66%가 다시 똑같은 자리에 계약직으로 재고용 되었다. 인건비감축을 위한 불법적인 조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그녀들은 사내부부해고에 대한 부당함, 억울함 등을 더욱더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대우와 시선의 다름, 임금의 차별 등을 당하고 있어야 해서 많은 스트레스와 분노를 갖게 되었고, 이는 곧 소송결의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소송이라는 것은 결국 본인들이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채근하고 설득해서 결정할 문제는 진정 아니다. 본인들이 원하는지, 주체적으로 소송에 임할 수 있는지가 확인될 때 소송은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들의 상담이나 지원의 원칙이다. 그래서 농협측 변호인 김00는 소송의 가나다도 모르는 무식한 발언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쉼없이 만들어 왔던 희망

우리는 99년 5월 13일, 여성우선해고라는 흐름에 역시나 분개하고 있던 여성학자 18명과 여성단체장 10명, 그리고 당사자 2인, 30인의 이름으로 함께 검찰청에서 농협중앙회를 헌법,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으로 고소, 고발하는 기자간담회를 열었고, 9시 뉴스에 방영될 정도로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다음달에는 해고무효확인 소송에 들어갔고, 여기에는 13명의 공동변호인단도 함께 하였다. 정확히 우리는 농협을 헌법 제32조 제4항(고용·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의 남녀평등), 근로기준법 제5조(균등처우), 제 30조(해고 등의 제한), 제31조 제2항(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의 제한), 남녀고용평등법 제2조의 2 제1항(정의), 제8조 제1항(정년 퇴직 및 해고) 위반으로 고소·고발하였다.
또, 그해 10월에는 사내부부해고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11월에는 농협중앙회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하였으며, 12월에는 여름부터 준비해온 농협사내부부해고의 부당성을 담은 비디오 '평화란 없다'의 시사회를 열기도 하였다. 4년 동안 사내부부해고가 성차별임을 알리기 위한 활동은 시쳇말로 안 해본 것 빼고 다해봤다. 법원에 우리의 의견서뿐만 아니라 학자들의 의견서, 각 시민사회여성단체들의 탄원서, 의견서, 성명서 등을 보내고, 농협사내부부해고는 성차별이라는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하였고, 농협 1,2,3차 소송자들이 모여 대책회의와 전략회의를 짜기도 하고, 농협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다시 환기시키기 위해 농협 사건 '후원의 밤'을 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1차 소송 당사자들은 민우회로 출퇴근하면서 국회의원, 노동조합 등을 방문하며 사건을 더욱 알려나갔고, 소송자들의 연락망을 짜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의 활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또 2000년에는 1차 소송당사자들은 여성대회에서 디딤돌로 선정되어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2000년 말 00통신과 00공단에서 터진 사내부부해고 사건 때 두 여성은 자신의 일인양 분개하며, 사이트면 사이트, 집회면 집회, 다 쫓아가 그녀들의 용기를 북돋고 상담자의 역할을 자임했다. 그리고 2차 소송자 36명, 3차 소송자 9명 등으로 소송은 계속 이어지면서 우리는 점점 힘을 더해갔다. 그녀들은 스스로 지역별로 연락망을 만들고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를 북돋았고, 다음사이트에 'goodnews752'라는 카페를 개설하여 희망을 조금씩 만들어갔다.
2002년에는 알리안츠 제일생명 사내부부해고 사건을 담은 비디오를 텔레비젼을 통해 상영하였고, 농협 3심 변호인단을 다시 16명으로 재구성하고, 5주간 대법원 앞 릴레이 1인 시위라는 대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4주간으로 기획되었던 릴레이 1인 시위는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의지로 5주로 연장되었고, 폭염, 그리고 장마 속에서도 1인 시위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진행되었다. 정리해보니 정말 많다. 나도 놀랬다.

세상을 향해 또 다시 앞으로

정말 많은 일을 해왔다. 너무나 길어지는 소송에 기운이 빠지기도 했지만, 나중에 조금이라도 후회할까봐, 너무나도 열심히 했던 사내부부해고 대응활동은 결국 '패소'라는 허탈한 결론을 짓게 되었다. '농협 후원의 밤'에서 농협해고자들의 열의에 고무되어 다시 파이팅을 결의한 알리안츠 해고자들이 열심히 싸워서 결국 승소, 복직되었다는 사실이 사내부부해고 싸움이 완전히 진 것만은 아니라는 위로를 주기도 하지만, 먼저 시작했던 사건이, 다른 비슷한 사건들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었던 최초의 사건이 법적으로 이기지 못해 큰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여성을 완전한 노동력으로 인정하지 않고, 누군가의 부인으로, 누구에 소속된 불완전한 노동력으로 바라보는, 가부장적 사고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도 안 되는 해고와 법원의 판결…. 언론도 여론도 '사내부부해고는 성차별이며 부당하다'는 것이 지배적이었을 정도로 사회적 합의는 충분하였다. 그러나 사법부는 아직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사건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아마 다음 세대 아니 몇 년 후에 이 판결을 보는 사람들에겐 아주 웃기는, 코메디와 같은, 말도 안 되는, 법계의 역사에 쪽팔리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라는 걸 그들은 알까?

하지만 사내부부 해고에 대한 싸움에 과정에서 우리는 승리하였다고 느낀다.
여름에 뙤약볕 아래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여러분들을 격려하며 공룡알만한, 난생 처음 보는 엄청난 크기의 수박과 과일들과 함께 삼계탕을 사먹으라고 편지 봉투에 곱게 쌓아 보내주신 돈, 지방에서 농협을 이용하는 농민들이 사내부부라서 해고된 해고자들이 억울할 거라며 복직시키라고 요구하는데 지금 판결은 어떻게 되고 있냐고 물어보는 전화, 해고된 여성의 남편인데 여성단체 활동에 관심이 없었다가 이 사건이 진행되는 걸 지켜보면서 여성민우회가 정말 열심히 하는 걸 알았고, 여성단체의 활동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며 격려전화를 하시는 분, 사건 판결이 있을 때마다 안부전화를 하시는 분들…. 정말 힘들 때마다 눈물이 날만큼 큰 힘이 되었다. 우리가 외로이 싸우는 건 아니구나. 이렇게 응원부대가 많구나, 이렇게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물론 이런 분들도 계셨다. 패소판결이 났을 때마다 마치 우리가 판결을 내린 양 판결에 대해 따지면서 화풀이 하시는 분,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추궁하듯이 물어보시는 분. 가슴이 아프기도 답답하기도 서럽기도 했다. 이제 그런 건 다 잊었다. 고마웠던 분들, 함께 했던 순간만 생각난다. (꼭 당선된 대선후보 같네요^^)

이제 2003년 새해를 맞이한다. 2001년, 2002년 빌었던 농협 승소라는 소원은 결국 못 이뤘지만, 2003년 소원을 다시 빌며 새롭게 시작하자. 농협 사내부부해고자들, 그래도 소송으로 마음 많이 치유되었기를. 앞으로 살아가며 우리 여성들이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을 향해 함께 싸워나가면서 조금씩 더 치유되길 바라며, 2차 소송자, 3차 소송자들의 꿈은 꼭 이루어지길 바래본다. 그리고 나도 이제 '농협'이라는 단어에 슬퍼지지 않기를 꿈꿔본다.